[한경에세이] 첫 직장의 조건
며칠 전 강의가 있어 지방에 갔다가 택시를 이용하게 됐다.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걱정거리를 듣게 됐다. 대학 졸업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들이 번듯한 곳에 취업을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택시 운전으로 아들딸 공부시키고 작은 집도 하나 장만했는데, 먹고 살기 빠듯하던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핸들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어느 정도가 번듯한 직장이냐고.’ 택시기사는 ‘그래도 수천만원 등록금 들여 공부시켰는데 대기업 정도는 돼야지 않겠냐’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다른 의미에서 번듯한 일자리가 많을 듯하다고 훈수를 뒀다. ‘첫 직장이니 굳이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중소기업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기사는 ‘대기업은 안정적이고 주변에 자랑도 할 수 있고 월급도 많지 않냐’며 조금 더 기다려서라도 대기업에 취업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첫 직장의 선택 기준은 급여였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농협중앙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금융회사는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지방대 출신으로 농협에 입사했지만 사람들이 업무 능력보다 학력 간판을 먼저 보는 것을 알았다. 이는 마치 식당 찾기와 같았다. 내가 잘 아는 지역에서는 간판보다 맛있고 실속 있는 집을 찾아가지만 처음 가는 곳에서는 속지 않으려고 간판이 큰 곳을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 나는 농협을 그만두고 중견 제약회사를 선택했다. 간판이 그리 번듯하지 않아도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일의 결과는 초고속 승진으로 이어져 30대에 임원이 됐다. 제약회사에서 관리, 공장장, 영업까지 두루 거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의 꿈을 품고 1990년 한국콜마를 창업할 수 있었다. 중소·중견기업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업에 입사하면 급여는 많을지라도 한동안은 조직의 부속품으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소·중견기업에서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이 땅의 청춘(靑春)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 대기업만 선호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적성과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지원해 보라고 말이다. 대기업 입사를 위해 자신의 꿈과 동떨어진 스펙을 쌓는 데 쓰는 열정을,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중소·중견기업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은 어떨까.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 자신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곳을 찾을 때 더 많은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윤동한 < 한국콜마 회장 yoon@kolmar.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