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국민연금에서 뿜어져 나오는 惡의 유혹
지난해 12월2일 금융위원회는 한 건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규제개혁을 위한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 국무회의 통과’였다. 상장기업의 주총 편의를 위해 전자적 방법으로 위임장을 교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의 내용이라는 설명이었다. 상장법인 합병 시 합병가액 산정기준을 완화하고, 자기주식 처분기한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등의 규제완화도 포함됐다. 그런데 이상한 조항이 하나 숨어 있었다. 연기금의 배당관련 주주권 행사 제약 요인을 해소해준다는 명분을 내세운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54조 4항, 제200조9항 개정이었다. 국민연금이 상장기업의 배당 결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연기금이 기업의 배당정책에 개입하더라도 이를 경영참여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 지분변동 공시 등 각종 규제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아뿔싸! 자칫 속을 뻔했다. 국민연금이라는 슈퍼갑에 더 막강한 권력을 쥐여주고 상장기업에 고배당을 압박할 수 있도록 몽둥이를 하나 더 쥐여주는 것을 금융위는 지금 규제완화라고 말하고 있다. 국민연금 펀드매니저의 숙원 사업을 해소해주었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상장기업들에는 엄청난 폭탄 규제가 새로 생겼다. 이런 궤변은 놀랍게도 국무회의를 무사히 통과했다. 국무회의에서조차 오류가 교정되지 않는다면 국가의 지력은 특정 장관의 낮은 지력수준으로 추락하게 된다. 국무회의는 몽둥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규제를 풀었다며 박수치는 봉숭아 회의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말장난은 무언가를 숨기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배당에 개입하는 것을 경영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속임수나 장난보다 더 질이 나쁜 궤변이다. 금융위가 그런 주장을 편다는 것은 무지라기보다는 악의에 가까운 것이다. 배당은 오늘의 현금 회수냐 내일의 투자냐를 결정하는 시간선호의 미학이다. 경영선택의 본질에 해당한다. 기업마다 고유한 배당정책이 있고, 이는 경영환경이나 소유지배의 구조, 그리고 세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대주주가 굳이 고배당을 포기하고 내부 유보를 선택하는 것은 모두 장단기에 걸친 기업가치를 고민한 결과다. 소액주주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주식을 팔고 떠나게 된다. 정부가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당장의 고배당을 강제한다는 것은 경영의 본질에 개입하는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주주권 행사를 국민연금 기관평가 기준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은 자만에 근거한 더한 폭거다. 금융위는 규제완화라고 둘러대기라도 했지만 기재부의 주주권 운운은 국민연금을 경기활성화에 끌어들이려는 정략에 불과하다. 기재부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당연히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 당연한 것을 왜 규정을 고치려고 하나. 그리고 주주권을 행사하려면 사안마다 연금가입자 총회부터 열어야 한다. 국민연금은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거대 독점투자 기관이다. 미국 캘퍼스 따위의 직역 연금과는 성격부터가 다르다. 대리인들이 앉아서 연금을 쌈짓돈처럼 써먹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도덕적 파탄이다.

만에 하나 사회주의 혁명 정당이라도 집권하게 되면 국민연금은 소위 주주권이라는 것을 통해 나라의 산업 전부를 지배하는 국가지주회사로 둔갑하게 된다. 지금 최경환 부총리는 그 길을 열자고 주장하고 있다. “배당을 늘리면 가계 소득이 증가할 것이고, 소비가 활성화되면 선순환 사이클이…” 운운한다면 소가 웃지 않겠나. 그런 것을 부두(voodoo) 경제학이라고 부른다는 정도는 알 것이다. 사실 기업유보 과세라는 것을 꺼내들 때부터 사이비 신학이 고개를 들었다. 국민연금 관리공사를 만들겠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정부가 직접 펀드매니저 노릇까지 해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사를 새로 만들 것이 아니라 연금 재산을 분할하거나 민영화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거대한 눈먼 돈을 깔고 앉아 있다 보니 끊임없이 악의 유혹이 솟아나고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