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미
퀴즈 하나 내보겠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수많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왕릉은 무엇일까요. 계단식 피라미드형으로 유명한 고구려 장군총? 이것은 장수왕의 무덤인지 아닌지 논쟁이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금관 출토로 잘 알려진 신라 황남대총? 이것도 내물왕인지 아닌지 추측만 존재합니다. 정답은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입니다. 어떻게 무령왕의 무덤인지 정확하게 아느냐고요. 우선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1971년 여름, 이미 공주 송산리 6호분으로 알려진 무덤의 배수로를 파던 중 한 인부의 삽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1400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유지된 무령왕릉의 벽돌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신라 못지않은 금관을 비롯해 단 한 차례의 도굴도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총 108종 2906점의 백제 유물이 있었습니다(그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됐습니다). 6세기 찬란한 백제의 아름다움이 긴 잠에서 깨어난 순간이었죠.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 무령왕릉

진묘수
진묘수
특히 왕의 시신을 모신 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록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판, 일명 ‘지석(誌石)’이 있었습니다. 여기엔 ‘백제 사마왕이 돌아가시고 이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처음엔 낯선 이름의 ‘사마왕’이 누굴까 의아해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보는 순간 곧 누군지 알게 됐습니다. 그는 바로 백제 25대 왕이자 웅진 시기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이었죠.

지난 시간에 봤듯이 백제는 5세기 장수왕의 파상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웅진에서 자리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귀족 세력들이 나약해진 왕권에 도전하면서 어수선했죠. 문주왕과 동성왕이 반대 세력에 의해 살해됐으며 귀족들의 모반은 연이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이를 확실하게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 무령왕이었습니다. 그는 반란 세력을 직접 제거했으며 고구려에 대한 공격에 나서 국력을 결집시키는 통치력을 발휘합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무령왕을 매우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는데요. 그에 따르면 왕은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 같았으며 매우 용맹하고 기묘한 전략을 잘 세웠다고 해요. 심지어 무령왕은 몸을 사리지 않고 기병 3000명을 직접 거느리고 나아가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답니다. 또한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에 전념하여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고 해요. 이런 백제에 대해 당시 중국은 “다시 강국이 됐다”고 평가했죠.

동아시아 문화 네트워크의 정점

[한국사 공부] 무령왕릉이 알려준 백제의 미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 싶은 점은 무령왕이 바다로 눈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웅진(공주) 시기에도 얼마든지 황해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이미 4세기 백제의 전성기에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동진, 왜 등과 교류하며 동아시아의 바다 네트워크를 구축한 경험이 있기에 무령왕은 이를 다시 복원할 수 있었죠. 중국 양쯔강 이남의 양나라로부터 문물을 수용했으며 일본과도 교류해 백제의 위상을 높였는데요. 그 증거가 바로 무령왕릉입니다.

무령왕릉은 기본적으로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무덤입니다. 삼국시대 왕릉이 대부분 돌을 활용한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죠. 연꽃 문양을 중심으로 수천 점의 벽돌을 쌓았는데 그 방식은 터널식입니다. 이 구조는 중국 남조 양식으로 당시 백제가 중국 양쯔강 이남의 양나라와 교류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연꽃 문양은 두 벽돌이 합쳐져야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관 입구에는 쇠뿔을 달고 돌로 만든 동물이 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기 돼지마냥 자그마한 덩치인데요. ‘진묘수’라고도 불리는데, 외부의 침입자를 막고 죽은 왕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가는 역할을 합니다.

왕과 왕비의 머리맡에는 금관모 장식 한 쌍이 발견됐어요. 중국의 역사서에 백제 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했다고 하는데요.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왕의 관모 장식은 불꽃 모양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른바 ‘당초문’이라 하여 식물의 덩굴이나 줄기를 물결 문양으로 나타냈죠. 참고로 이 당초문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들어왔으며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동서 교류의 흔적이기도 하죠. 물론 백제 미술의 독자성도 보입니다. 왕비의 관모 장식은 연꽃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새긴 것인데요.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선보입니다. 왕의 시신 옆에는 둥근 고리 모양 자루 장식의 칼이 놓여 있었어요. ‘환두대도’라고 하는데 이 둥근 고리 안에는 용을, 바로 아래 자루에는 봉황을 장식해 무령왕을 최고 군주로 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중흥의 실마리, 무령왕릉

한편 무령왕의 목관은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당시 백제가 일본과 교류한 것을 알 수 있죠. 흥미로운 것은 왕비의 발 부근에서 청동다리미가 발견됐는데요. 이는 일본에서도 간혹 나오는데 중국 남조의 제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 남조 양나라와 백제, 일본으로 문화적 교류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무령왕릉은 6세기 백제가 튼튼한 동아시아 바다 네트워크를 통해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를 통해 성왕대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며 더욱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게 해주는 역사적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