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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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등장했지만
18세 데뷔해 우승…세계제패 꿈꾸다 후배에 지며 나락

‘지옥의 링’서 부활
좌절감에 술독 빠져…이악물고 수렁 탈출, ‘생활속 운동’ 개척

‘인생의 링’선 챔피언
몸·정신 모두 강조 “재미있다” 입소문…강연 섭외 ‘1순위’


1982년 11월 서울 장충체육관. 18세의 권투 선수가 마우스피스를 물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사각의 링에 올랐다. 프로 데뷔 5개월 만에 페더급 신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이희성 씨(51·사진)였다. 이씨는 이날 세계 정상급인 태국의 산삭디 무왕수림 선수에게 6회 KO승을 거뒀다.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이씨의 인기는 치솟았다. 그는 대부분의 경기를 KO로 이길 만큼 속시원한 경기를 펼쳤다. 대전료도 100만원이나(?) 받았다. 대졸 초임 월급이 18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세계챔피언의 꿈도 커갔다. 하지만 4개월 후인 1983년 3월 마산체육관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이씨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력이 한참 뒤처진다고 생각한 선수에게 방심한 탓인지 3라운드 KO패했다. 그때부터 그의 권투 인생은 끝없는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13년 동안 알코올 중독자 생활

이씨는 억대 연봉의 스타 강사다. 국내 1호 ‘컨디션 트레이너’라는 이름으로 맹활약 중이다. 컨디션 트레이너는 이씨가 지은 이름이다. 정신 건강과 몸 건강을 동시에 바로잡아 주는 트레이너란 뜻을 담았다. 그런 만큼 그의 강연은 좀 다르다. ‘시간 내서 운동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게 아니다. 생활하면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을 농담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가르친다.

연초 신한금융그룹 간부들이 모여 며칠 동안 진행한 경영세미나에서도 그의 강연이 단연 인기를 끌었다. 한 참석자는 “예쁜 여성 요가강사 등으로부터도 여러 번 교육을 받았지만 이씨만큼 큰 호응을 얻은 강연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마산체육관의 패배 이후 1996년 3월까지 꼭 13년간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 지냈다. 처음 맛본 패배도 힘들었지만 그로 인한 좌절을 이기기 위해 무리한 운동을 한 게 디스크와 관절염으로 이어졌다. 재활 치료는 쉽지 않았다. 재기에 대한 의지는 점차 약해졌다.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시며 환상에 빠졌던 대가는 혹독했다.

술에 빠졌다. 싸움도 잦았다. 세계챔피언이 눈앞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장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왔다. “끊임없이 그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는 돌아봤다. 자살도 두 번이나 시도했다.

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자원했다. 휴가 때마다 싸움이 났다. 장사를 하던 부모님이 피해자들과 합의하며 힘겹게 무마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직장을 찾을 수도 없었다. “평소엔 정상적인데 술만 먹으면 제어가 안 되더군요. 마실 때마다 폭음을 하니 건강도 안 좋아졌습니다.”

주점 주인의 권유로 알코올 중독 치료에 성공

그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술집 주인의 권유 덕분이다. 10여년째 술에 빠져 지내던 1994년 어느 날, 이씨는 그날도 술집문을 밀고 들어섰다. 자리를 안내해주는 주인에게 “술을 끊게 해주는 사람에겐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앞으로 술 끊는 일은 영영 멀어지겠구나’라는 우울한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집 주인은 서울 강동성심병원에 단주모임이 있다는 말을 해줬고,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는 바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배운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은 어려운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무력함에 절망할 때 찾아온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의지를 확인하도록 돕는 게 알코올 중독 치료의 첫 번째 단계”라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혼자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술을 끊고 싶으면 남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스스로 첫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주변에서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습니다. 단주모임에서도 그런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제안만 할 뿐 강요는 없습니다.” 치료모임에 나간 지 2년 만에 이씨는 단주에 성공했다. 치료하는 동안에도 실패를 반복했지만 1996년 3월부터 지금까지 19년 가까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여 재기 시작

[人사이드 人터뷰] '국내 1호 컨디션 트레이너' 건강 강사 이희성, 절망을 KO시킨 그대가 진정 챔피언
술에 빠져 지내는 동안 재기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만화가 이현세의 작품 ‘지옥의 링’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영화사를 찾았다. 권투 선수가 주인공이라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연배우는 정해져 있었다. 그는 배우에게 권투를 가르치겠다고 사정해 영화에 참여했고, 감독 눈에 띄어 조연으로도 출연했다.

컨디션 트레이너 길로 들어선 건 1989년 10월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운동공학협회를 알게 돼 2년간 공부해 운동공학 트레이너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이 생겼지만 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94년 알코올 중독 치료모임에 나가기 전까진 일을 제대로 해내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폭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혼도 늦어졌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을 이겨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술을 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일상으로도 이어졌다. 프로야구단부터 대학 야구단, 고교 배구단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부탁했다.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무료로 선수들의 트레이닝을 맡아주기도 했다.

1996년 술을 완전히 끊은 다음엔 사람도 달라졌다. 이전보다 유쾌해졌고 그런 모습은 운동을 가르칠 때도 나타났다. 무료로 강습해 주는 학교 주변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가정을 꾸리고 있는 부인과도 술을 완전히 끊은 이듬해인 1997년에 만나 그해 결혼에 골인했다.

“좋은 운동은 유쾌하고 즐거워야”

그는 자신이 스타 강사로 뜬 비결에 대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도 써먹을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는 운동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 쓰는 근육을 움직여 주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른손을 주로 쓰는 권투 선수들도 훈련 때는 오른손과 왼손의 자세를 바꿔준다는 데서 착안했다. “몸의 균형을 위해 오른손잡이는 왼손을 의도적으로라도 많이 써줘야 하고, 컴퓨터를 보는 직장인은 고개를 들고 목을 쭉 펴는 자세를 일부러라도 취해 줘야 합니다.”

이씨는 자신이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좋게 만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운동을 가르치면서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면 안 됩니다. 집착하기 시작하면 노력한 부분을 잊게 돼 결과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만큼 그는 책도 많이 냈다. 지금까지 쓴 책이 ‘빼-친절한 뱃살 사용설명서’ ‘컨디션 트레이닝’ 등 5권이다. 단주모임에도 여전히 나간다.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기도 하지만 다른 중독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다. “앞으로도 알코올 중독자들을 도우며 살 겁니다. 그들도 저처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싶어요.”

■ 이희성 씨가 말하는 다이어트 특급 비법
틈날 때 맨손체조 하면 식사할 때 양과 속도 조절 가능해져요


이희성 씨는 180㎝의 큰 키에도 페더급에서 활동했다. 현재 페더급은 61~66㎏이지만 그가 선수생활을 할 때만 해도 57㎏ 이하였다. 술에 빠진 뒤 몸무게는 93㎏까지 불었다. 다이어트를 해 지금은 72㎏의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이씨는 뱃살을 빼는 데는 왕도가 없다고 말했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 있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사람도 있지만 결론은 누구든 많이 먹으면 몸무게는 불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운동량보다는 식사량을 조절하는 게 뱃살을 빼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식사량을 줄이기 위해선 밥을 먹을 때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먹는지 생각하면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배가 불러오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적정량 이상을 먹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TV를 보면서, 혹은 너무 많은 사람과 왁자지껄 떠들며 먹는 건 다이어트에 큰 방해가 된다고 말했다.

사무실에서도 틈만 나면 맨손체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리와 무릎, 어깨 등을 조금씩 돌려주면 된다는 설명이다. “맨손체조 자체로는 칼로리 소모량이 많지 않지만 호흡이 편안해지면서 식사할 때 양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