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보류하면서 건강보험제도를 포함한 수조원의 ‘의료패키지’ 수출 기회도 함께 날려버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건강보험 도입을 원하는 개발도상국에 한국의 제도와 운용 노하우뿐만 아니라 의료기기, 제약, 정보통신기술(ICT)을 패키지로 수출할 기회가 열리고 있지만 최근 정부가 불합리한 부과체계를 당분간 유지하기로 하면서 수출 ‘골든타임’을 놓치게 됐다는 것이다.

건보 개편 무산 '후폭풍'…수조원 의료수출 기회 날아간다
30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보건복지부 등 관계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주요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국의 건강보험 및 병원관리 시스템, 의료기기 등을 한 덩어리로 묶는 의료산업 수출 전략을 준비해 왔다. 지난해 11월 오만 보건부와 1년간의 협상 끝에 50만달러 규모의 건강보험 도입전략 컨설팅 계약에 성공한 것이 첫 사례다.

정부 관계자는 “단순히 건강보험을 수출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국가와 의료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데도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건보 시스템이 도입 12년 만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돼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점에서 중동과 개도국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28일 정부가 연말정산 파동에 이은 증세 논란을 우려해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연기하면서 어렵사리 열린 수출문이 다시 닫힐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예정대로 정부가 잘못된 건보료 부과체계를 연내 손질만 하더라면 건보 제도는 물론 관련 의료산업의 본격적인 수출상품화가 가능했을 텐데 개편을 미루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50개국이 넘는 곳에서 한국의 건보제도를 배우러 오는 등 관심을 보이다가도 연간 수천만건의 민원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놀라서 돌아간다”며 “형평성이 떨어지는 현행 부과체계를 바꾸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의료 패키지 수출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불합리한 부과체계 때문에 발생한 지난해 건보료 관련 민원은 6000만건에 달한다.

의약업계의 한 전문가는 “한국의 건강보험제도가 여러 국가에 도입된다면 건보 자격 관리와 징수 시스템 등 전산 시스템까지 함께 수출하는 것은 물론 수조원대 병원과 의료장비, 의약품 수출도 가능했을 텐데 아쉽다”며 “현재 부과체계 문제가 수출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말 아랍에미리트(UAE)와 서울대병원이 맺은 의료 시스템 수출 규모는 1조원이 넘는다.

정부가 뒤늦게 건보료 부과체계를 손질하더라도 이번 ‘타이밍’을 놓칠 경우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오는 10월 유엔이 제안할 2016~2030년 ‘새천년 복지플랜’ 아젠다에 ‘보편적 건강보험제도 도입’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직 전 국민적 건보 제도를 구축하지 못한 국가들은 연내 다른 나라의 모델을 수입해 자국 내 도입을 서두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한국처럼 전 국민적 건보시스템을 시행하고 있는 일본과 프랑스 등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이날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 마련이 사실상 백지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을 재차 부인했다. 그는 “오는 2월2일 여당 원내대표단과 정책위원회 의장이 바뀌면 당정협의에서 종합적으로 논의해 재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은이/도병욱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