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不信의 그늘…외면받는 대통령 도서관
내년 4월 서울 상도동에 지하 4층, 지상 8층 규모로 문을 여는 ‘김영삼 대통령 기념 도서관’(사진)이 운영 주체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도서관을 짓고 있는 ‘김영삼 민주센터’가 김 전 대통령의 모교인 서울대와 도서관 인근의 중앙대에 운영을 맡아 달라고 의뢰했지만, 두 대학은 운영비 문제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 기념 도서관조차 운영주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영삼 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정신 등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4월 첫 삽을 떴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건립비의 30%를 국고에서 지원한다. 당초 지난해 6월 완공 예정이었는데, 재원 문제 등으로 완공이 미뤄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치不信의 그늘…외면받는 대통령 도서관
도서관이 완공되더라도 내년부터는 국고 지원이 끊겨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이미 김 전 대통령이 출연한 사재와 모금액 등을 건립 공사에 투입한 김영삼 민주센터 측은 여력이 없는 상태다.

김영삼 민주센터가 서울대와 중앙대에 운영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민주센터 관계자는 “대학처럼 공공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학문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운영을 맡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아직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김영삼 민주센터 부이사장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까지 나서 성낙인 서울대 총장 등 두 학교 고위층과 접촉하고 있지만, 연간 8억원에 달하는 운영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양교 실무진의 반대가 적지 않아서다.

대학들은 전직 대통령 도서관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한 서울대 교수는 “서울대 출신인 YS가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와 같은 업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IMF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던 만큼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통령 도서관은 김영삼 도서관뿐만이 아니다. 서울 상암동에 2012년 개관한 박정희 도서관은 공공도서관 위탁운영을 둘러싼 서울시와의 갈등으로 전시관만 열어 놓고 있다. 2003년 문을 연 김대중 도서관도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2010년께 장서 대부분을 연세대 중앙도서관으로 옮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포항에 있는 한동대는 지난 10월 기념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가 총학생회 등의 반발로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통령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자랑거리가 된 지 오래다. 미국 대통령을 기념하는 첫 도서관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9년 자신의 공문서, 편지 등을 국가에 기증해 건립됐다. 1955년엔 대통령도서관법도 제정됐다. 이후 조지 W 부시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퇴임을 전후로 도서관을 짓는 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현직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기념도서관 유치엔 벌써부터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등 4개 대학이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내가 싫어하던 대통령이라도 기념하는 것을 용인하는 ‘관용’이 부족해 생긴 문제”라며 “한국 민주주의 미성숙의 한 단면”이라고 논평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도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기념이란 점에서 대승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치를 냉소와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정치권과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멍에”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