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에도 꿈쩍않는 공무원…규제 풀게 할 '당근'이 없다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개혁 끝장토론’. 렌터카를 빌릴 때 운전자 알선도 허용해 달라는 현장 건의가 나왔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에는 외국인, 장애인 등 일부에게만 운전자 알선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선 검토를 지시했고, 국토교통부는 6월까지 관련 규제를 해소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8월이 돼서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택시, 버스 등 다른 운송업계 반대가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식으로 끝장토론 당시 박 대통령 앞에서 풀겠다고 한 현장 규제 52건 중 39건이 6개월 동안 방치됐다. 대부분 해당 부처 공무원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8월 말 국무회의에서 “공무원들이 규제 개혁에 소극적”이라며 강도 높게 질타했다. 박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국토부는 움직였다. 소형 승합차 등에는 운전자 알선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관련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였다.

장관 지시도 무시하는 말단 공무원

규제개혁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세 가지 테마 중 하나다. 박 대통령의 관심이 대단하다.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들을 단두대에 한꺼번에 올려 처리할 것”이라는 살벌한 표현까지 쓸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

대통령 말에도 꿈쩍않는 공무원…규제 풀게 할 '당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규제가 사라질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른바 ‘건수 줄이기’를 위해 단순한 절차적 규제인 ‘손톱 밑 가시’만 뺄 뿐, 기업에 정작 필요한 인허가 규제인 ‘염통 밑 고름’은 손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규제개혁에 대한 정부의 ‘선언적 의지’만 있을 뿐 원칙이 없는 데다 일선 공무원들도 규제의 관성에 젖을 대로 젖어 있기 때문이다.

전직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해외여행 때 달러 환전 한도를 풀도록 해당 과에 지시했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은 시큰둥했다. 풀어선 안 되는 온갖 이유를 대며 오히려 장관을 설득했다. 담당 국장을 인사조치하겠다는 으름장까지 놨다. 그래도 과장과 사무관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담당 과를 없애고 나서야 규제가 풀렸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반도체산업이 클 수 있었던 건 정부에 반도체과가 없었기 때문이란 게 빈말이 아니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관료의 힘은 규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자기가 쥔 권한을 절대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특히 말단 공무원들의 규제에 대한 집착은 가히 필사적”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당 출신 관계자는 “‘늘공’(직업 공무원)은 과장급만 돼도 정권이 서너 번 바뀌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위에서 몰아붙이면 하는 시늉만 한다.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법보다 무서운 행정지도

기업들은 법이나 규정 개정으로 해결이 안 되는 ‘보이지 않는 규제(그림자 규제)’가 더 무섭다고 한다. 이 역시 공무원의 규제 집착에서 비롯된 문제다. 고용이 전국경제인연합회 규제개혁팀장은 “관료들은 법을 개정해도 각종 행정지도나 구두지도를 통해 규제의 끈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인들로선 법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게 그림자 규제”라고 말했다. 엄연히 규제임에도 규제를 규제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홍길동 규제’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보험업에 대한 소비자 민원을 줄이기 위해 만든 ‘보험 민원 감축 표준안’이 대표적이다. 2년 안에 보험 민원을 50% 감축하라는 일종의 구두지도다. 법적 근거가 없지만 금감원은 매분기 이행성과를 평가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검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검사’라는 엄한 벌칙이 주어지는 만큼 업계에서는 사실상 강제 규정으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비정기적인 가격 인상 자제, 가격 인하 권고 등도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전형적인 구두지도다. 대기업엔 신규사업 진출의 족쇄로 작용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역시 법적 근거 없는 내부지침이다.

일선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규제는 기업에 더 직접적인 타격이다. 건축 허가 등 실질적인 인허가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 서구는 한 건설회사가 합법적으로 건축 허가를 신청했음에도 주민 반대 등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이후 부산시 행정심판위원회가 이를 부당한 처분이라고 판단했지만 해당 구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행정자치부의 감사에 걸릴 때까지 불허가 처분은 풀리지 않았다. 구청 담당 공무원은 가벼운 징계를 받는 정도에 그쳤지만 해당 건설회사는 자금이 묶여 생사를 오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전경련 규제개혁팀 관계자는 “정부가 새로 출범할 때마다 규제 척결을 외치지만 매번 실패하는 것은 현상 유지가 최우선 목표인 공무원들의 속성을 깨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규제에 집착하는 공무원의 본능을 개조하는 것이 규제개혁 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했다.

공무원 규제개혁에 나설 환경 조성 필요

공무원도 할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한다는데 규제개혁에 반대할 공무원이 어디 있겠느냐”는 게 이들의 항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개혁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사후 문책’ 우려 때문이다. 규제를 덜컥 풀었다가 괜히 엉뚱한 사고나 민원이라도 발생하면 담당 공무원이 고스란히 책임을 뒤집어쓴다. ‘누구 맘대로 규제를 풀었느냐’는 질책도 받아야 한다. 민원인이 국회에 문제라도 제기하면 국정감사에도 오르내릴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형사책임도 져야 한다. 그렇다보니 ‘괜히 먼저 나섰다가 책임을 지느니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라는 공무원 특유의 보신주의가 퍼질 수밖에 없다.

감사원의 정책감사도 마음에 걸린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정책감사 결과 절차상 하자가 발견되면 공무원은 문책을 받게 된다. 담당 공무원으로선 조금이라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이라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성과보상체계가 사실상 없는 것도 문제다. 사고가 터지면 벌을 받지만 아무리 잘해도 사기업처럼 성과급이나 특진 같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게 공무원이다. 한 지방 공무원은 “오래된 규제일수록 이해관계자가 맞서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일에 잘못 나섰다가는 잘해야 본전”이라고 말했다. 학계 관계자는 “규제개혁에 미온적인 공무원도 자세를 고쳐야 하지만 성과보상체계를 개편하는 등 이들이 규제개혁에 적극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임원기/김주완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