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가지 않고 배우러 갔더니 재취업 성공
대기업 연구개발(R&D)사업부에서 전무로 근무하다 작년 말 퇴임한 A씨(56)는 올초 3개월간 미국 실리콘밸리와 인도 벵갈루루 등을 다녀왔다.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기업 탐방이 목적이었다. 혼자서 구글과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을 탐방하고 지인들을 만나 미국 벤처기업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A씨는 몇몇 기업에서 1년 고문직을 제의했지만 고민 끝에 거절했다. ‘뒷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고 싶었다. 기술 동향을 파악하려고 최신 연구 논문도 챙겨보는 등 재취업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마침내 지난 9월 그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법인 기술 담당 전무로 재취업할 수 있었다.

이력서는 계속 업그레이드

재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뚫은 퇴직 임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고 글로벌 헤드헌팅 업체의 K상무는 전한다.

“재취업에 성공한 임원들은 퇴임 직후 세계 정보기술(IT) 산업단지로 떠나요. 그것도 아내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서 가지요. 휴식을 취하기 위해 관광지를 찾는 분들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K상무는 올해 재취업에 성공한 40여명의 퇴직 임원 특징을 나름대로 분석해 이같이 전했다.

K상무는 “잠시 휴식기간을 가진 뒤 구직 열망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헤드헌팅 업체에 연락하고 이력서를 재취업 희망업체에 맞춰 계속 수정하는 이들이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크다”고 조언했다.

한 번 쓴 이력서를 고치지 않고 방치하는 이들은 재취업 성공률이 뚝 떨어진다는 것이다. 퇴직 후 기업 탐방을 했다는 사실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반영함으로써 채용 결정권자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요즘 그는 대기업 임원 인사 후 퇴직한 임원을 하루에 두 명씩 상담하고 있다.

또 현직 때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던 소위 ‘마당발’에게도 구직 의사를 떳떳이 밝히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와 친척들을 만나 자신의 경력 등을 밝힌 뒤 재취업에 성공한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구직 자체를 일종의 프로젝트로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래야 동창과 지인을 만나 식사할 때 먼저 지갑을 꺼내 밥값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가고 싶은 회사의 인사(HR) 담당자나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 있게 의견을 표현할수록 소통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면서도 겸손해야 한다. 기존 회사에서 누렸던 기득권을 말끔히 지우고 갑(甲)의식을 내려놓아야 추천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전문가가 많다.

재취업 골든타임은 퇴임후 12개월

재취업에 성공한 퇴직 임원들의 구직 기간은 대개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많았다. K상무는 “퇴임 후 12개월이 ‘골든타임’이고 2년 이상 쉬게 되면 경력 단절로 인해 사실상 재취업이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점에 기업들이 찾는 퇴직 임원은 어떤 이들일까. K상무는 “올해는 ‘회사를 턴어라운드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많이 찾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해당 업종의 전문성을 지녔는지 △사업구조 재편 때 잡음 없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지 △직전 직장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인물인지를 중점적으로 따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불경기 때 재취업되는 임원들은 한마디로 ‘타고난 리더십 역량가’”라며 “냉정함과 따뜻함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터”라고 묘사했다. 그는 내년에도 경기를 장담하기 어려운 만큼 영업 전문가들이 재취업에 유리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 대기업 출신으로 재취업에 성공한 임원의 나이는 54세(1960년생)가 가장 많았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