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1원1표, 1인1표
1원1표는 시장의 원리다. 정치의 1인1표와는 달리 냉정하다. 누구라도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정의로운 체제다. “그것에 걸맞은 사람이 그것을 갖는 것”을 정의(justice)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1원1표는 욕구의 크기를 증명하는 불가피하게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그런 규칙을 경매현장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적절한 금액을 써내기 위해 노력을 다하게 된다. 역경매도 마찬가지다. 공급자가 써내는 정가표는 다양한 가격을 제안한다. 가격이 먼저 제안되고 그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상품을 선택한다.

1원1표에는 사표(死票)가 없다. 각자의 구매력은 마지막 1원까지도 행사된다. 정치에서는 언제나 구조적으로 무더기 사표가 나온다. 또 사표의 크기만큼 정의는 훼손되고 분노가 자란다. 물론 그나마의 유효표조차 나중에는 실망으로 뒤바뀐다. 1원1표가 정확하게 관철되는 곳은 주주총회다. 각자는 지분의 크기만큼 의결권을 갖는다. 이를 통해 자본은 최고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주주 평등권은 각자가 주식수만큼 지배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정치 표결에서의 평등권, 즉 1인1표와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난데없이 연말주총 소동을 촉발시킨 자본시장법 관련 조항은 주주평등권의 본질을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이다. 자본시장에 정치 원리를 윤색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시장을 파괴하게 된다. 논란이 되고 있는 섀도보팅 금지도 그렇지만 감사를 선출할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고 있는 상법 조항들이 모두 위헌적이다. 주식이 아무리 많아도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되고 여기에 더해 섀도보팅까지 금지해버린 규정은 1원1표를 1인1표로 바꿔치려는 정치적 음모다.

섀도보팅은 말 그대로 대량의 주식보유자(대부분은 기관투자가들이다)가 자신의 주권을 주총에서의 찬반표결에 비례적으로 행사하도록 하는 위임계약이다. 자신이 직접 주총에 참여할 필요는 없지만 회사로 하여금 유효하게 주총을 진행하도록 예탁원을 통해 편의를 베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시장법이 이 섀도보팅을 금지시킨 것이다. 더구나 25% 이상의 주주들이 직접 주총에 참석해야 한다는 강행규정까지 작동 중이다. 이 때문에 자칫 내년 정기주총의 불성립을 우려한 130여개 회사들이 대거 감사 선임을 위한 별도의 임시주총을 연다고 생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섀도보팅 금지는 가능하면 많은 소액주주가 주총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위 ‘그랬으면 좋겠다 법’의 하나다. 희망사항을 법률과 혼동하는 이런 법들은 필시 소액주주의 직접행동을 통해 대주주를 견제하자며 시민운동가들이 만들어낸 악의적 법률이다. 당연히 주주평등권을 침해한다. 주주평등권은 1원1표이지 1인1표가 아니다. 사실 소액주주에게는 주식을 매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속한 투표 행위다. 그들은 주총과 상관없이 주식을 사고판다. 이는 기관투자가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태생적 유권자’일 수밖에 없는 정치와의 차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유권자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액주주는 주식 투자로 돈을 벌기 위해 주주가 된 것이다.

대주주와 소액주주는 전혀 같지도 않다. 심지어 상속세나 자본이득 차익과세에서는 세율까지 차별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보유기간, 주주 지위, 회사와의 이해관계, 매매의 자유, 책임의 유무 등에서 소액주주와 대주주는 같을 수도, 같아서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법률들은 이것을 억지로 같게 그리고 대주주를 역차별하는 조항들로 채워놓고 있다. 집중투표를 배제하는 안건 표결에서 의결권을 제한하도록 하는 조항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느 증권시장도 이런 식으로 대주주를 차별하지 않는다. 더구나 기권이나 거부도 당연히 주주의 권리다. 이는 정치 유권자의 권리이기조차 하다. 그런데 25% 이상의 참석을 강제한 주총 유효 조항이라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기업의 의사정족수를 인민주의적으로 개악해 놓은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국회는 뒤늦게 섀도보팅이 가능하도록 자본시장법 부칙조항을 개정할 계획이라지만 언제까지 이런 해프닝을 되풀이할 것인가.

정규재 논설위원 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