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태평양 시대를 준비하며
‘나는 헛살았다!’

이순(耳順)을 넘긴 소설가 김훈이 태평양의 섬들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해 남긴 말이다. 태평양 도서지역 하면 타히티를 그린 고갱의 그림이나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훌쩍 떠나고 싶은 설렘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의 넋이 묻힌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며, 우리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태평양 도서국들은 다자외교 무대에서 우리의 필수적인 협력 동반자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24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14개 태평양 도서국과의 외교장관회의는 새로운 외교 지평을 열어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피지 방문에서 보듯, 태평양 도서지역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이들 14개국을 모두 합쳐도 인구는 한국의 약 5분의 1에 불과하고 국내총생산(GDP)과 교역 규모 또한 2%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는 이 지역의 무한한 잠재성에 주목한다. 태평양 도서국가들은 광대한 배타적 경제수역을 통해 풍부한 어족자원은 물론 해저열수광상 등 미래 유망 광물자원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고, 해수온도차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 여건 또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2011년 제1차 한·태평양도서국 외교장관회의 이후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회의에서는 세 가지 방향에서 태평양 도서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첫째, 동북아·동남아·미주·대양주에 이어 이들 도서국가와 협력 확대를 통한 동반자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그간 도서국의 주요 협력 대상은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었으나 이제 신뢰받는 중견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새로운 동반자가 돼 상호 윈윈할 수 있는 시장과 기회를 열어갈 것이다. 이번 정부 출범 이래 중견 5개국 외교장관회의(MIKTA)를 창설하고 걸프협력회의(GCC·6개국), 아랍연맹(22개국), 비세그라드 중부유럽그룹(4개국), 노르딕 이사회(5개국), 북극이사회 및 태평양동맹 가입 등 새로운 지역 협의체와 협력해 왔다. 이번 회의를 통해서는 우리 외교 지평을 본격적으로 태평양까지 확대하는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 ‘포스트 2015 개발체제’와 내년도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의 신기후체제 협상 타결을 염두에 두고 ‘인류 공영에 기여하는 중견국 실현’이라는 외교 목표에 기여하고자 한다.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고통받는 투발루와 팔라우 등 같이 도서국이 직면한 개발 문제와 기후변화의 도전은 세계인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고 녹색기후기금에 최대 1억달러 공여를 약속하는 등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선도하고 있다. 양자 차원의 개발 원조를 확대하면서 원조 효과를 높이고 도서국의 인적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 사업도 계속함으로써 개발 분야 글로벌 이슈를 선도하는 국가로서 모범적 개발협력 모델을 공유하고자 한다.

셋째, 양측 국민들이 마음으로 다가서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번에 방한하는 도서국 장관들은 대학생들과 토크 콘서트를 할 예정이다.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태평양을 발견하는 ‘현재와 미래의 대화’가 될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한국 청년들이 태평양 지역의 발전 잠재력을 이해하고, 기회의 창을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많은 학자가 정치, 경제의 중심이 유럽과 북미대륙을 거쳐 21세기 아태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광대한 지역의 한복판에 미래 자원과 문화적 다양성의 보고인 태평양 도서국들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과 태평양 도서국들이 다가오는 태평양 시대를 함께 열어갈 것으로 확신한다.

윤병세 < 외교부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