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상장기업 H사는 지난 21일 감사 선임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열었다. ‘원래 임기가 내년 3월 정기주총 때까지인 감사 P씨가 중도 퇴임했기 때문’이라는 게 개최 사유다.

그런데 H사는 임시주총에서 P씨를 다시 임기 3년의 감사로 재선임했다. 결과적으로 이처럼 형식적 주총이 열린 것은 섀도보팅제 폐지가 내년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H사 관계자는 “내년부터 감사 선임 때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3%로 묶이면 감사를 신규 선임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 같아 이번에 임시주총을 열어 감사 임기를 연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 선임’ 대소동

'섀도 보팅' 폐지 날벼락…때 아닌 '연말 주총' 붐
23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내년 섀도보팅제 폐지를 앞두고 올 연말에 감사·감사위원 선임을 위한 임시주총을 여는 기업이 급증하고 있다. 섀도보팅제 폐지로 감사·감사위원 선임에 어려움을 겪을 것에 대비해 미리 감사 임기를 연장하려는 곳들이다.

기업들은 “‘꼼수’라는 비난을 받겠지만, 내년 정기주총에서 감사 선임을 못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4월부터 이달 21일까지 감사·감사위원 선임을 위한 임시주총을 열거나 소집결의를 한 기업은 모두 134개사(유가증권 37개사, 코스닥 97개사)에 달했다. 전체 상장기업(1673개사)의 8%에 해당하는 숫자다. 특히 이 가운데 11월(1~21일)에 임시주총 소집을 공시한 곳은 93개사나 됐다. 이들 93개사는 모두 올해 12월30일 이전에 임시주총을 열어 감사·감사위원을 선임할 예정이다.

매년 2~3월 정기주총 시즌이 아닌 연말에 100곳에 가까운 기업이 감사·감사위원을 선임하는 임시주총을 여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상장회사협의회는 섀도보팅제 폐지가 ‘연말 임시주총 붐’을 불러왔다고 설명한다. 협의회 관계자는 “11월에 임시주총 소집공고가 집중된 건 올해 안에 임시주총을 열려면 최소 40일 이전인 11월21일까지 주총 소집공고를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섀도 보팅' 폐지 날벼락…때 아닌 '연말 주총' 붐
○재계 “상품권을 주라니…”

이 같은 양상은 섀도보팅제가 주총을 형식적으로 만들고 대주주의 경영권 강화 수단으로 쓰인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가 내년 1월부터 폐지하기로 발표한 데서 비롯됐다. 기업들은 내년부터 주총 의결을 거치려면 발품을 팔아 ‘전체 주주 25% 이상, 출석주주 50% 이상’의 찬성표를 주총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건 감사·감사위원 선임이다. 감사·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 의결권이 최대 3%로 제한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이 50%인 기업을 가정해보자. 감사 선임 때 대주주 지분 중 3%만 인정되기 때문에 추가로 22%의 찬성표를 소액주주 등의 위임장을 받는 방식으로 받아와야 한다.

만약 찬성표를 얻지 못해 감사·감사위원을 선임하지 못하면 과태료를 물어야 하고,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은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뒤 상장폐지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재계는 섀도보팅제 폐지를 재검토하거나, 차선책으로 주총 결의요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구용 상장회사협의회 회장은 “정부는 소액주주들에게 상품권을 줘서라도 주총장에 데려오라고 하는데, 기업들 부담이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며 “내년 경영계획도 짜야 하는데 이런 규제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지적했다.

■ 섀도 보팅

shadow voting. 정족수 미달로 주주총회가 무산되지 않도록 미참석 주주들도 투표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1% 지분을 보유한 주주 100명 중 10명(10%)만 주총에 참석해 찬성과 반대가 7 대 3으로 나올 경우 나머지 90명(90%)도 이 비율대로 표결한 것으로 계산한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