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기둥들', 지도층의 거짓과 위선 고발…'대사 연극' 진수
김광보 극단 청우 대표는 LG아트센터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았을 때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떠올렸다. 번역을 부탁할 겸 국내 최고의 ‘입센 전문가’인 김미혜 한양대 연극학과 명예교수를 찾아갔다. 김 교수는 “김 대표가 잘 만들 수 있는 기막힌 작품이 있다”며 또 다른 입센 작품을 추천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작품이었다. 작품 개요를 받아 본 김 대표는 무릎을 탁 쳤다. 어느 시대에서나 통용할 수 있는 사회 비판과 삶의 통찰을 담고 있는 이야기에 ‘지금 우리의 현실’이 들어 있었다.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사회의 기둥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입센이 137년 전 쓴 숨겨진 명작이 ‘우리 시대의 살아 숨 쉬는 연극’으로 되살아났다.

무대는 잘 짜인 사실주의 연극의 본보기를 보는 듯했다. 노르웨이 어느 소도시, 지역 영주(領主)이자 조선소 사장인 베르니크의 거실이 배경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 개방과 개발이란 변화의 높은 파고 속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사회의 기둥들’이 침몰해 가는 모습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지역 사회의 이익과 발전’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협잡을 일삼는 사회 지도층의 이중적인 윤리의식과 속물적인 근성이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김 대표 특유의 속도감 있는 연출과 절제된 무대 미학이 빛을 발한다. 거실이란 단일한 배경에 소도시 전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변화와 현상을 잘 짜인 극적 구성으로 치밀하게 녹여낸 거장의 솜씨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대사 연극’의 참맛을 보여준다. 1100여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배우들이 한 치도 어긋남 없는 호흡과 속도 조절로 주고받는 대사는 무선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귀에 쏙쏙 전달된다. 완벽에 가까운 화음을 빚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듯했다. 극 중 인물에 동화된 배우들의 뛰어난 발성과 발음,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은 전체적인 연기의 균형이, 좋은 음향 시설을 가진 공연장과 조화된 결과다. 전체를 기울어져 가는 선실처럼 디자인해 ‘지금 우리의 현실’을 은유하는 듯한 무대 세트도 공연장과 잘 어우러진다.

다양한 장르가 상연되는 LG아트센터에서 해외 우수작 초청 공연이 아닌 우리 말로 공연되는 수준 높은 연극을 감상할 기회는 많지 않다. 연극 팬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무대다. 오는 30일까지, 3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