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용 KMW 회장(왼쪽 세 번째)이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이동통신 소형 기지국 기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KMW 제공
김덕용 KMW 회장(왼쪽 세 번째)이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이동통신 소형 기지국 기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KMW 제공
“나 죽고 관 속에 들어가면 그때나 해.”

한국에 진출한 미국기업 휴렛팩커드(HP)에 다니던 남편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자 부인은 강력히 반대했다. 남편 김덕용 씨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달을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집을 팔아 사업자금 5000만원을 마련해 서울 구로공구상가 근처에 12평짜리 공장을 월세로 얻었다. 1991년의 일이다.

창업 후 매출은 2년 넘게 수억원 수준에 그쳤다. 이익은 내지 못했다. 둘째 딸은 4만원이 없어 유치원을 그만뒀다. 하지만 김씨는 지금 매출 3000억원대 통신장비 회사 KMW의 회장이 됐다.

○믿는 것은 기술

김덕용 KMW 회장은 통신장비를 국산화하겠다는 생각으로 창업을 했다. 2년 뒤인 1993년 말부터 사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페이저(삐삐) 송신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개발해 삼성전자에 납품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25억원이던 매출은 1997년 480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외환위기가 터졌다. 매출의 80%가 삼성에서 나왔는데, 어음 할인이 안돼 돈줄이 막혔다. 1998년 매출은 반토막이 났다.

김 회장은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방을 쌌다. 인연이 있던 알카텔루슨트에 납품하기 위해 15시간을 비행기로 날아갔다. 미팅 시간은 단 30분이었다. 이때부터 해외시장 개척을 시작했다. KMW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60%를 넘겼다.

2007년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이듬해 ‘키코(KIKO·환헤지 통화옵션상품)사태’가 터졌다. 원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40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고 김 회장은 그때 골프채를 던져버렸다. 그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힘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론은 공대 출신인 그가 믿고 의지했던,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기술 개발’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 옆에 ‘크레이지 연구소’를 만들어 엔지니어들을 불러모았다. 몇 년 동안 ‘미친 듯이’ 기술 개발에만 전념했다. 2010년 KMW는 4세대 이동통신 소형기지국(RRH) 개발에 성공해 매출을 3000억원대로 끌어올렸다.

○R&D 투자비율 높아

매출 1000억원을 넘긴 벤처기업들의 핵심 경쟁력은 대부분 연구개발(R&D)에서 나왔다. 지난해까지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벤처기업 454개사(누적)의 평균 매출액 대비 R&D비 비중은 2.7%로 중소기업(0.7%)은 물론 대기업(1.2%)보다 훨씬 높았다. 지난해 ‘1000억원 벤처기업’에 신규 진입한 56개사 중에는 에스엔유프리시젼, 엘엠에스, 와이솔 등의 R&D 투자비율(매출액 대비)이 5%를 넘는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지난해 처음 매출 1000억원을 넘긴 56개사의 업종을 보면 전자부품 반도체 등 기술기반의 제조업을 하는 곳이 37.5%(21개사)였다”며 “이런 회사들은 R&D 비중이 높다”고 말했다.

○한우물 전략으로 승부

이들 기업은 대부분 ‘한우물’을 파는 전문화 전략으로 기술력을 키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성SDI 연구원 출신으로 2002년 미래나노텍을 설립한 김철영 사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3M만 넘어서면 된다”는 단순한 목표를 사업 초기에 세웠다. 3M이 장악하고 있던 디스플레이 광학필름 분야에 도전해 10년 만에 시장의 20%를 차지했다. 지난해 매출 2788억원을 기록한 미래나노텍은 최근 3M이 독점하고 있는 도로교통표지판 반사필름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지난해 벤처1000억클럽에 가입한 원액기 생산업체 휴롬의 김영기 회장도 한 곳에만 전념했다. 휴롬 돌풍이 일자 곳곳에서 사업 제안을 받았지만 김 회장은 모두 거절했다. 원액기를 어떻게 더 잘 만들지에만 집중했다. 작년 매출 1000억원을 넘긴 휴롬이 올해 새로 내놓은 제품은 ‘2세대’ 원액기 휴롬이었다.

안재광/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