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션發 미술품 가격 파괴
50억원대의 자산을 굴리고 있는 부동산 개발업자 이희성 씨(57)는 지난 5일 K옥션 특별경매에서 원로화가 김종학의 50호 크기 ‘설악 풍경’(2001년작)을 추정가 수준인 8500만원에 낙찰받았다. 10년 전부터 미술품 수집에 나선 임창근 씨(59·식품제조업체 사장)는 지난 9월 서울옥션 가을 경매에서 이우환 화백의 15호 크기 ‘선으로부터’(1978년작)를 3억7000만원에 베팅했다. 2008년 이후 미술시장 침체가 이어지면서 작품값이 크게 떨어져 더 이상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최근 미술품 경매시장에 ‘국민화가’ 박수근을 비롯해 이중섭, 김환기, 이우환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쏟아지고 있다.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었던 2007년에 비해 최저 3분의 1 수준까지 떨어진 가격이어서 그림 투자의 적기가 아니냐는 분석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박수근 등 유명 화가 작품 올 1만3000점 경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경매시장에 나온 유명 화가들의 작품은 1만2000여점. 올해는 연말까지 1만3000점이 출품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림을 사려는 사람보다 매물이 더 많아지는 전형적인 ‘바이어 마켓’이 형성되고 있는 것. 이에 따라 그림 가격 파괴가 확산되고 있다.

‘빨래터’(45억2000만원)로 국내 경매 최고가 기록을 보유한 박수근의 1960년작 ‘고목과 여인’은 오는 25일 진행되는 서울옥션의 홍콩경매에 6억원에 나와 있다. 또 다른 작품 ‘시장’은 올해 초 4억원에 팔렸다. 2005~2007년 박 화백의 점당 평균 경매가(15억원대)에 비하면 60% 이상 싸졌다.

한때 화랑가에서 10억~20억원대를 호가했던 김환기의 작품도 6억~10억원대에 경매되고 있다. 그의 푸른색 점화 ‘무제 25-V-70 #173’은 추정가 9억원대로 이달 경매에 나와 있고, 또 다른 작품 ‘봄의 소리’는 올해 초 6억1000만원에 낙찰됐다.

9월 서울옥션과 K옥션의 가을 경매에는 추상화가 이우환의 작품이 20점 가까이 한꺼번에 나왔다. 이씨의 작품 ‘선으로부터 No.12-12’는 수작인데도 시중가보다 30% 이상 싼 5억940만원에 낙찰됐다. ‘동풍’(3억6224만원), 1993년작 ‘조응’(1억7035만원) 등도 줄줄이 저가에 낙찰됐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이씨의 작품은 지난 11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00호 작품 ‘선으로부터’가 23억원에 팔리는 등 국제 시세가 20억원 선인데도 국내에서는 매물이 넘쳐나 가격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매시장 저가 공세에 화랑가 바짝 긴장

저가 매물이 쏟아지자 경매 낙찰액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서울옥션, K옥션, 아이옥션이 9월 잇달아 실시한 가을 경매에서는 총 181억여원의 자금이 단번에 유입됐다. 하지만 값이 싼 작품에만 매기가 몰리면서 낙찰률은 여전히 60~70%에 머물렀다. 미술평론가 정준모 씨는 “미술품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으나 투자심리가 본격적으로 살아나지 않아 저가 작품에만 ‘입질’하고 있다”며 “시장의 불확실성만 해소된다면 바로 상승 추세로 돌아설 것”으로 내다봤다.

미술시장 전문가 김윤섭 씨도 “그림값이 이미 바닥권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컬렉터들이 미술품 구입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화랑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림값이 떨어지면 작가의 수익 감소가 불가피하고, 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당 1000만원대 작가 김흥수를 비롯해 김종학 이숙자 사석원 등 일부 작가 작품값이 턱없이 낮은 가격에 경매되고 있어 전시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종현 미즈화랑 대표는 “생존 작가의 그림값이 경매가와 최대 세 배 이상 벌어졌다”며 “개인전을 열어도 경매의 저가 공세 때문에 한 점도 팔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작가를 육성하는 화랑은 사실상 고사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