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블랙홀과 웜홀
부귀영화를 다 누리다 깨어보니 한낱 꿈이더라는 일장춘몽 설화는 어디에나 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하룻밤 지내고 돌아왔더니 몇십 년이 흘렀더라는 시간여행 전설도 많다. 동굴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잠든 새 20년이 지났더라는 독일민담과 이를 패러디해 미국의 독립전쟁 전후 상황을 그린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도 비슷한 경우다.

지난주 유럽연합 우주탐사선이 지구를 떠난 지 10년8개월 만에 혜성에 도착했다. 그 전에 보이저호는 태양계의 마지막 영역으로 진입하는 데 36년이나 걸렸다. 이대로는 인간의 수명으로 다른 은하계까지 여행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영화 ‘인터스텔라’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킵 손의 ‘웜홀(wormhole)이론’을 토대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웜홀이란 서로 다른 두 시공간을 잇는 구멍이나 통로, 즉 우주 공간의 지름길을 말한다. ‘사과를 관통하는 벌레구멍(wormhole)으로 반대편까지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비유에서 나온 용어다. 처음에는 빛까지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그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의 연결 통로로 여겨졌지만, 화이트홀의 존재가 불투명해지면서 블랙홀끼리 연결되는 순간이동 통로일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블랙홀은 ‘강한 중력 때문에 좁은 공간이 심하게 구부러져 빛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을 뜻한다. 에너지를 다 소모해서 쪼그라든 별이 엄청난 중력으로 주변의 빛까지 빨아들일 때 그 이동 통로가 곧 웜홀인 것이다. 두 공간을 도화지처럼 구부렸을 때 가까워진 지점을 파이프로 연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킵 손 박사는 웜홀의 한쪽 입구를 빠르게 이동시켰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면 시간지연 현상이 발생하고, 이를 활용하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터스텔라’에서 행성의 1시간이 우주선 안에서 7년으로 그려진 것도 마찬가지다. 남녀 주인공이 행성에서 3시간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우주선에 남아 있던 사람은 23년을 혼자 보내는데, 이는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이다.

킵 손은 칼 세이건에게 영감을 준 학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이건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 ‘콘택트’나 ‘이벤트 호라이즌’ ‘혹성 탈출’ 등 웜홀이론을 바탕에 깐 작품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잠깐 눈 붙였다 일어나니 안드로메다 은하더라’는 말도 곧 실현될지 모른다. 시간을 극복하는 게 인간에게 복이 될지 독이 될지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