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의 ‘행동대장’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31일 ‘통 큰’ 양적 완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추가 양적 완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었지만 시장에서 예상치 못했던 ‘깜짝’ 결정이었다. 그만큼 소비세 인상 이후 일본 경기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의미다.

구로다 총재는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한다”는 발언을 행동으로 옮기며 디플레이션 탈피 의지를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미국이 양적 완화 종료를 선언한 지 이틀 만에 일본이 추가 양적 완화를 단행키로 하면서 엔화 약세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선제공격 나선 구로다

일본은행은 이날 연간 60조~70조엔 증가하고 있던 본원통화를 80조엔까지 10조~20조엔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국채 매입을 50조엔에서 80조엔으로 30조엔 늘리고, 장기채 매입을 통해 평균 잔존기간(듀레이션)도 현재 7년 정도에서 7~10년으로 최대 3년 연장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고위험 자산인 상장지수펀드(ETF)와 부동산투자신탁(리츠) 보유잔액도 각각 연간 3조엔과 900억엔으로 현재보다 3배 늘리기로 했다. 구로다 총재는 “일본 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계속하고 있다”면서도 “소비세율 인상 후 수요 위축과 원유 가격의 대폭적인 하락이 물가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디플레이션 탈피가 늦춰질 위험이 높아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유지하기 위해 추가 양적완화를 실시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시장에 불안 심리가 확산되기 전에 ‘디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선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일본 경제는 지난 4월 소비세 인상 후 급격히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2014회계연도 1분기(4~6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7.1%(연율)로 급락한 데 이어 2분기(7~9월)도 회복세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행은 이날 2014회계연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0%(7월 시점)에서 0.5%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성장률 전망치는 지난해 10월 1.5%로 처음 제시된 후 올 1월 1.4%, 4월 1.1%로 꾸준히 낮아져 왔다. 소비자물가상승률도 1.3%에서 1.2%로 하향 조정됐다.

◆미·일 금리차 확대 전망

일본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닛케이225지수는 단숨에 16,400선을 회복하며 7년 만에 최고로 치솟았다.

니시오카 준코 RBS증권 일본법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이번에 늘린 자산매입 규모가 아주 크진 않지만 ETF와 리츠 매입을 더 크게 늘리기로 해 증시 상승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은 이번에 ETF 매입 대상에 지수 영향력이 큰 JPX닛케이400지수 연동 ETF를 추가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가치는 6년10개월 만에 최저로 곤두박질쳤다. 구로다 총재의 기자간담회 후에는 111.59엔(오후 6시)까지 떨어졌다. 구로다 총재는 “(추가 완화가) 환율에 영향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이 양적 완화를 끝내고 금리인상 국면에 접어들기로 한 시점에서 미·일 간 금리차는 더욱 확대될 수 있어 엔화 약세는 심화될 것이란 전망이다. 국제금융전문가인 도시마 이쓰오 도시마이쓰오사무소 대표는 “엔·달러 환율은 목표치가 115엔대로 높아졌다”고 말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