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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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가계 부채는 2000~2007년 급격히 늘어났다. 이 기간 부채 총액은 두 배로 늘어나 14조달러까지 치솟았고, 가계 소득 대비 부채 비율도 140%에서 210%로 껑충 뛰었다. 이후 일어난 사건은 모두들 알고 있는 이른바 ‘대침체기’다. 2007~2009년 미국에서만 약 8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400만채 이상 주택이 압류됐다.

1920년대 ‘대공황’ 초기도 ‘대침체’ 직전 부채 증가와 견줄 만하다. 1920년부터 10년간 미국 도시 지역 주택 담보 대출액은 세 배 뛰었다. 유럽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7~2007년 사이 가계 부채가 크게 늘어났던 나라일수록 불황이 닥친 2008~2009년 가계 지출은 더욱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빚으로 지은 집》은 이런 증거들을 바탕으로 대공황과 대침체, 현재의 유럽 경제 위기가 늘어난 가계 부채로 인한 소비 지출의 급락으로 초래됐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재앙에는 거의 언제나 가계 부채의 급격한 증가란 현상이 선행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리먼브러더스 파산 등 금융 시스템을 마비시킨 은행의 위기를 꼽아왔다. 2008년 9월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집값이 하락하면서 모기지 대출과 관련된 금융 자산의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이들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은행들이 자금의 공급을 줄여 경제 전체가 위험해졌다”며 “연방 정부가 부실 자산과 관련된 위험을 줄이고 자금을 긴급하게 공급해 은행들로 하여금 다시 자금을 공급하도록 하겠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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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자들은 “구제 금융을 통해 금융 시장의 자금 흐름을 원활하게 하려는 정책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말하는 불황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과도하게 누적된 가계 부채가 저소득층의 주택 압류를 불러온다. 이는 소비 지출의 급감으로 이어지고 다시 생산 감소와 대규모 실업을 일으킨다.

저자들은 네 가지 실증적 증거를 제시한다. 첫째, 심각한 경기 침체 이전에는 가계 부채 증가가 선행한다. 둘째, 주택 자산 가격 급락의 손실은 저소득층에 더 큰 피해를 입혀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셋째, 가계 지출 감소는 주택 관련 자산 감소에 따른 가계 부채의 증가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넷째, 집값 하락으로 인한 손실은 빚이 많은 가계에 집중된다.

가계 부채로 인한 악순환을 끝내는 방법은 없을까. 무책임하게 빚을 끌어다 쓴 사람들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는 것은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황을 해소하기 위해 기업과 가계에 추가 대출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선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해장술을 마시려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저자들은 “가계 부채를 직접적으로 줄이는 것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금융 시스템이 융통성 없는 채무 계약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가계에 과도하게 빚을 지게 함으로써 돌아가는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오직 채무자에게만 위험을 지우는 방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집값 하락의 충격은 고스란히 주택 소유자만 받게 된다는 것.

저자들은 위험 분담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책임 분담 모기지’를 제안한다. 주식처럼 돈을 빌려준 대부자도 위험과 책임의 일부를 나눠 가지는 형태에 보다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값이 오를 때는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 이득을 보고, 반대로 떨어질 때는 손실도 분담하는 구조다.

저자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대외 채무의 위험성을 잘 관리했지만 높은 민간 채무로부터 비롯된 문제에 여전히 노출돼 있다”고 지적한다. 2012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16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133%를 훌쩍 넘고 있다. 올해 가계 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섰음에도 경기 진작을 위해 정부가 가계 부채를 늘리는 정책을 내놓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저자들은 “한국 경제가 당면한 위험은 우리가 해외의 여러 역사적 사례들에서 살펴본 경우와 비슷하다”며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