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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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당시 권선주 기업은행 부행장(58)이 행장에 내정되자 보도를 준비하던 기자들은 그의 ‘고향’을 두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전북 전주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이력서상 본적이 경기 김포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본적이 시댁으로 바뀝니다. 남편의 고향이 김포여서 제 본적이 김포가 된 거죠.” 호주제가 폐지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권 행장의 설명이 뒤따르고 나서야 혼선이 없어졌다.

여성 은행장은 그만큼 생소했지만 취임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이제 권 행장을 ‘여성 은행장’보다 ‘은행장’으로 보는 시선이 훨씬 많다. 나이 많은 쟁쟁한 남자 뱅커들을 이끌어야 하는 데다 정부가 대주주여서 외풍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은행인 점을 감안할 때 ‘여성 행장은 시기상조 아니냐’던 일각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행장에 오르기 전까지 해왔던 것처럼 행장 자리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녀 구분 없는 시대 준비하라”던 어머니

서울 을지로 기업은행 본점 인근 그의 단골집 ‘죽향’에서 권 행장과 마주했다. 소박하고 정갈한 맛의 죽 전문식당이 그와 닮은 듯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권 행장은 얼마전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받았다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보며 어린 시절 얘기를 풀어 놓았다. “4학년 때 시 짓기 숙제가 있었어요. 써서 냈더니 담임 선생님이 ‘누가 대신 써준 게 아니냐’고 묻더군요. 문학에 소질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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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소녀’가 된 것은 부모님 덕분이다. “책을 많이 사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골방에서 항상 책을 읽었어요.”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는 게 그의 얘기다. 어머니는 어린 권선주에게 “곧 남녀 구분이 없는 시대가 온다. 실력을 키우고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식당의 대표 요리 중 하나인 불고기겨자채가 나왔다. 죽 전문이지만 예약하면 준비해주는 특별 메뉴다. 권 행장은 직접 들고 온 와인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상업은행 행원이었다. 전주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가 태어나 고향이 전주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다시 서울로 발령받은 덕분에 그는 풍문여중을 나와 경기여고에 진학했다.

◆도우미를 시어머니로 떠받들며 악전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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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을 살려 연세대 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아버지를 비롯해 친척 상당수가 은행에 근무했던 터라 자연스레 은행으로 진로를 바꿨다. 은행이 ‘최고의 직장’이던 시절이었다. ‘여(女)행원’ 제도가 없어지고, 남녀 구분 없이 뽑은 ‘공채 1기’로 기업은행에 입행했다. 2남 3녀인 그의 집에서 언니와 여동생도 은행에 들어갔다. 권 행장의 집은 동네에서 유명한 ‘은행집’이 됐다.

이어 나온 시원한 문어냉채는 와인과 더 잘 어울렸다. 여행원으로서 쉽지 않았던 직장생활 얘기를 시작했다. 권 행장에겐 여자 동기가 3명 있었다. 남자 동기까지 모두 55명이었다. 여자 동기들은 결혼 후 모두 은행을 떠났다. 그는 은행에 다니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직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힘들지만 당시 일하는 엄마의 삶은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어느 날 퇴근 하니 초등학생이던 큰아들이 팔을 움켜쥐고 누워서 앓고 있었어요. 병원에 갔더니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이 부러졌더군요. 엄마가 걱정할까봐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반성을 많이 했어요. 직장 생활 때문에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했으니까요.” 그는 10년 가까이 입주 도우미에게 육아 도움을 받았다. “도우미를 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모셨습니다. 단순히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오래 같이 있을 수 없었죠.” 리더와 윗사람으로서의 자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권 행장은 ‘좋은 도우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했지만 시어머니처럼 챙겨준다면 누구라도 좋은 도우미가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여자는 장독대나 닦으라”던 남자 동료

주위에 온통 남자 직원뿐인 직장생활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동기 모임에도 부르지 않더군요. 술 마시고 사우나 갈 건데 같이 갈 수 없다는 이유였지요.” 그래도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 자식 때문에 인생이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책에 ‘권선주’라는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러 쓰면서 나중에 누구의 아내, 엄마가 아닌 ‘권선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은행 영업은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자리가 대세였다. 남자 직원들과의 경쟁에서 큰 ‘핸디캡’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술로 영업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차, 3차까지 가면 영업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좋지 않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술은 1차까지만 하고, 대신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차별화했습니다. 결과는 더 좋았습니다.”

그는 지점에만 27년을 근무했다. 원조 프라이빗 뱅커(PB)로 불리는 이유다. “지금은 은행에서 좋은 상품이 나오면 안내책자가 함께 잘 나오지만 그 당시에는 고객들한테 문서를 가져다주기 힘들었어요. 전 일일이 다 출력해서 상품을 추천했습니다.”

험한 일도 부지기수로 겪었다. 지점장 시절 사채업자들이 떼로 찾아와 은행에 큰 규모 예금을 넣고 대출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여자 지점장인 것을 알고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좋지 않은 돈’인 것을 눈치 채고 거액의 예금을 모두 빼가라고 했다. 본점에 얘기해 실적에서도 삭제하는 단호함으로 위기를 넘겼다.

어음 사기도 당할 뻔했다. 꾸준히 어음을 할인하던 고객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금액이 커지고, 업종이 달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 해당 고객의 과거 어음 할인 서류를 전부 가져와 일일이 대조했다. 정상적인 계약서가 아닌 것을 알아채고, 실사를 나가 확인한 뒤 거래를 중지시켰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아니었으면 모르고 당할 뻔했던 일이다. 남자 직원들의 무시도 만만찮았다. “어느 날 한 남자 동료가 ‘은행에서 열심히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장독대나 열심히 닦으라’고 하더군요. 크게 충격받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집에 가서 정말 장독대를 닦고 다시 나와서 일했어요. 누군가 저를 무시하면 제가 모자라서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CEO는 ‘지시’보다 ‘질문’하는 사람

구수한 해물파전과 동짓죽이 식사로 나왔다. 한 술 뜬 뒤 말을 잇는다. 첫 여성 행장이 됐지만 사실 행장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감히 지점장 외에는 아는 직책도 없었어요. 특히 저는 본점 근무 경력이 없어 큰 기회가 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요. 나중에 들어 보니 저를 본점으로 스카우트하려는 남자 상사가 있었는데 남자 부하들이 계속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결국 입행 27년 만인 2005년에야 CS센터장으로 본점에 입성했다. 우수한 실력으로 PB 부사업단장, 외환사업부장 등을 거쳐 2011년 집행간부(카드사업본부장)로 수직 승진했다. 리스크관리본부장을 거쳐 지난해 12월 행장에 올랐다.

행장이 되고도 집안일은 그대로다. 생선 굽는 실력이 프로급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생선을 언제 딱 한 번 뒤집으면 되는지 알고 있죠. 어떻게 아느냐고요. 일을 배우듯이 요리도 공부하면 됩니다.”

그가 행장이 됐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직원 설문에서도 ‘여성 행장’에 대한 걱정이 나왔다. ‘대외 네트워크가 약하지 않으냐, 은행에 어려운 일이 닥칠 경우 헤쳐나가기 어렵지 않겠느냐’ 등이었다. 그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리더십으로 걱정을 잠재웠다. “저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8000여명 임직원의 도움을 받으면 되죠. 은행장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라고 하면 직원들이 머리 대신 몸만 쓰겠죠. 지시가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게 좋은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온 행력(行力, 권 행장이 말하는 행력이란 집단지성이다)을 모으기 위해 직원들의 의견을 더 많이 듣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제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습관입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나면 은행장 혼자 결정하는 것보다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제2의 권선주’를 위해 여성 후배 키우기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회의를 대부분 서서 한다. 짧게 하기 위해서다. 보고서 대신 전화 보고를 주로 이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아 시설도 중요하지만, 불필요한 업무 시간을 줄여 퇴근 시간을 당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성들이 직장과 가정을 함께 지킬 수 있는 방법이죠.”

여성금융인 모임11년째 활동…女뱅커 지위 향상 힘써

[한경과 맛있는 만남] 권선주 기업은행장 "여자는 집에 가서 장독대나 닦으라는 말에 장독대 닦고 다시 나왔어요"
권선주 기업은행장은 사단법인 여성금융인네트워크(회장 김상경)에서 11년째 활동하며 후배 ‘여성 뱅커’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모임은 은행 지점장급 이상 여성 100여명이 회원으로 있다. 이들은 분기별로 만나 금융권 주요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다. 은행권 여성 리더 배출을 위해 교육도 하고 있다.

목표는 은행권 과장 이상 여성 인력이 전체 여성 은행원(5만7000여명)의 30%(1만7000여명)를 넘기는 것이다. 지난해 과장급 이상 여성 은행원은 1만2000여명으로 전체의 23%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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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주 은행장의 단골집 죽향 가평 잣·완도 전복 사용…주말엔 외국인 관광객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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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저동에 있는 죽 전문점이다. 10년 이상 영양사 경력을 가진 여주인이 80세의 어머니와 함께 만든다. 어머니는 평생 식당을 운영했다. 영양사 주인은 ‘맛’만큼이나 ‘건강’을 생각한다. 재료 대부분은 유명 국산품을 쓴다. 잣죽은 가평 잣으로, 전복죽은 완도 전복으로 끓인다. 버섯굴죽, 매생이죽, 팥죽 등도 인기다.

예약하면 죽 말고도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것은 그만큼 음식에 신경을 더 쓰기 위해서다. 불고기겨자채, 문어냉채, 해물파전 등을 찾는 사람이 많다. 영업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다. 주말에는 일본인 등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다. 설, 추석 연휴 말고는 1년 내내 문을 연다.

전복죽은 2만원, 나머지 죽은 대부분 9000원 선이다. 예약 요리인 불고기겨자채와 문어냉채는 4만원이다. 해물파전은 1만5000원에 먹을 수 있다. 소주, 맥주, 막걸리도 팔지만 원하는 술이 있으면 직접 가져와 마셔도 된다. 전화번호는 (02)2265-1058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