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빌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에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세 남녀 이야기가 나온다. 무국적자인 ‘나’와 배우를 꿈꾸는 처녀, 고향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의사. 이들은 위태로운 사랑과 불확실성 속에서 짧고도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이 작품의 중심 무대는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역 온천도시에 있는 의사의 별장이다. 그래서 소설 제목부터 ‘슬픈 빌라’다.

유럽에서는 이처럼 빌라가 자연 속의 별장이나 고급스런 교외주택을 뜻한다. 그 원형은 고대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티볼리에 지은 하드리안 빌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메디치 등 피렌체의 대상(大商) 가문들도 화려한 별장 주택을 경쟁적으로 짓곤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도시의 연립·다세대 같은 공동주택을 뭉뚱그려 부르는 용어로 많이 쓴다. 빌라 두세 채를 연립으로 이어짓는 4층 이하의 소형 다세대주택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독신자와 학생, 샐러리맨, 신혼부부가 많은 대학가나 직장 주변, 신개발지구 등에 많다.

법적으로는 연립주택이 연면적 660㎡ 초과인 4층 이하이고, 다세대주택이 660㎡ 이하인 4층 이하이지만 딱히 구분하지 않고 빌라로 통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부자 동네의 호화 빌라도 없진 않다. 하지만 아직은 최신식 아파트에 비해 ‘서민 주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가끔 외국인이 ‘~빌라’라는 주소를 보고 어마어마한 저택이나 별장에 사는 것으로 오해해서 깜짝 놀라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미국 유학생 사이의 우스갯소리도 심심찮게 떠돈다. 장학금을 신청할 때 주소지가 ‘~캐슬’이면 “성(castle)에 사는 갑부집 주제에 무슨…” 같은 핀잔을 듣고 ‘~파크’면 “공원(park) 신세를 지고 있다니 더 받아가라”며 알뜰히 챙겨준다지 않는가. 하긴 곳곳에 즐비한 ‘~가든’도 정원(garden)이 아니라 국도변 고깃집과 도심의 식당을 가리키는 것이니, 외국 사람들로서는 헷갈릴 만하다.

그런데 최근 빌라 건축이 급증하고 있다. 올 들어 8월까지만 전국에서 2만1333가구가 새로 지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신축 빌라가 3년 전보다 세 배나 늘어날 모양이다. 한때 아파트에 밀려 공급이 줄었던 빌라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인데, 가장 큰 이유가 전세난이라니 마음이 착잡하다. 서울에선 뉴타운 취소 지역이 더 그렇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은 건축 기술과 재료가 좋아져서 소음·난방 시비도 크게 줄었다. 관리비 또한 아파트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잘만 고르면 ‘캐슬’ 부럽지 않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