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펜의 진화
각명(刻銘)문자와 표면(表面)문자를 구별한 철학자는 독일인 빌렘 플루서다. 그는 필기구의 연원을 하느님이 자신의 숨결을 흙속에 새겨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에서 찾는다. 기원전 7000년 수메르인들이 나무나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해 만든 필기도구 ‘스타일러스’로 점토판을 긁은 것도 이런 작업에 대비될 수 있다고 플루서는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집트인이 파피루스에 그린 것(표면문자)보다 각명이 우선한다고 봤다. 영어의 scribe나 write 또한 새기고 깎는다는 데서 유래한 건 사실이다.

정작 깃털로 된 필기도구 퀼트는 로마에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에선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걸 싫어했다. 소크라테스는 펜으로 글을 쓰면 사고가 정형화하고 생각이 마비된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반면 로마는 제국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기록이 필요했다. 자연스레 펜이 발전한 것이다. 타자기는 볼펜이나 만년필보다 훨씬 앞서 1874년 개발됐지만 20세기 들어서야 확산됐다. 편두통과 시력저하에 맞서려고 타자기를 사용했던 니체는 글쓰기 도구가 우리의 사고에 동참한다고까지 말했다. 그가 타자기로 쓴 작품들은 펜으로 썼을 때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게 철학자들의 평가다.

볼펜의 등장은 남달랐다. 존 로드가 1888년 가죽과 나무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발명한 볼펜이 불과 한 세기 만에 필기 도구의 왕자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값싸고 잉크를 채울 필요가 없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속적인 혁신이 뒷받침했던 건 물론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연필과 펜 등 필기구의 매출 신장세는 꾸준하다. 특히 남미와 아시아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아시아 시장은 10억달러를 넘겼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기업이 경비삭감으로 필기구 지급을 줄이자 사원들이 직접 취향에 맞는 필기구를 구입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추세 때문인지 개성이 강한 필기도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과 결합된 첨단제품도 속속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글을 쓰면 내용이 자동으로 음성 녹음되는 기기가 있는가 하면 글을 쓰면 인쇄체로 바뀌어 기록되는 펜도 나와 있다. 아이패드와 일반 용지 겸용으로 쓰는 펜도 있다고 한다. 필기구의 패러다임 변화다. 무엇보다 독일의 파버나 슈테트처럼 세계적 필기도구업체들이 혁신을 이끌고 있다. 펜이나 연필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