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가난 뚫고 붓끝서 꽃핀 베트남의 봄
지난 3월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의 자선경매 ‘화이트 세일’ 현장. 베트남 화가 부이샹파이(1920~1988·사진)의 드로잉 ‘풍경’이 경매에 나왔다. 50만원부터 시작한 이 작품은 응찰자들의 열띤 경합 속에 추정가의 10배인 500만원에 전화 응찰자에게 돌아갔다.

베트남의 전설적 화가로 불리는 부이샹파이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와 공산주의체제를 거치면서 느낀 시대적 고뇌를 동양적인 미감으로 승화시킨 작가다. 베트남 화단에서는 전쟁과 빈곤 속에서도 예술적인 열정 하나로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민화가’로 추앙하고 있다. 하노이 에콜 드 보자르의 분교인 인도차이나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라는 공산당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해 옥고를 치렀다. 작고 후 8년 만인 1996년에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2009년 2월 EBS가 ‘하노이, 천년의 붓’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생애와 작품, 베트남 미술을 소개했다.

최근 베트남의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서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는 국내 미술애호가가 부쩍 늘고 있다.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는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해 오는 31일까지 부이샹파이 특별전을 연다. 한국경제신문 창간 50주년 기념전이다.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부이샹파이의 1970년대 유화 ‘까우 고 거리’.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부이샹파이의 1970년대 유화 ‘까우 고 거리’.
‘베트남 불멸의 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전시에는 하노이 거리 풍경을 비롯해 시골 풍경, 딸의 자화상, 생활 주변의 사물을 담아낸 유화, 드로잉, 판화, 과슈 등 30여점이 걸렸다. 대가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로부터 근대미술을 받아들였고,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베트남 미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부이샹파이는 공산 치하의 어둡고 쓸쓸한 하노이 거리와 개방 후 활력이 시작되는 하노이 거리를 즐겨 그렸다. 1970년대 이후 그린 ‘까우 고 거리’ ‘하노이 거리풍경’ ‘호안끼엠 호수’ 등 유화 작품 5점이 관람객을 반긴다. ‘까우 고 거리’는 도시의 소통 공간이던 거리에 있는 전통 가옥을 붓칠한 것. 분홍색 미감이 묻어나고, 동양적 사색의 깊이가 느껴진다. 하노이 주위 사물을 진지한 시선으로 붙잡은 ‘하노이 거리풍경’, 시민들의 휴식처로 유명한 ‘호안끼엠 호수’ 등의 작품에도 전쟁의 상흔과 애수 어린 감흥이 단아하고 깊게 녹아 있다.

딸의 얼굴을 목판 위에 그린 작품 ‘여인상’도 걸렸다. 조국의 근대화를 간절히 고대하던 작가의 마음이 그림 속 딸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동료 화가를 비롯해 소녀와 말, 행복한 부부 등을 연필이나 과슈로 그린 드로잉 작품도 여러 점 감상할 수 있다. 부이샹파이는 전쟁 중에도 매일같이 드로잉을 생활화했다. 가족은 물론 주변 인물의 얼굴을 여러 장의 인물화로 남겼다.

1995년 국내에 베트남 미술을 처음 소개한 구삼본 93뮤지엄 관장은 “베트남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중국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미술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일부 베트남 작가 작품도 감상을 겸한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