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고 최승호 시인은 썼다. ‘무형의 놀이터’처럼 바람이 불다 간 자리에 은빛으로 서 있는 모습이 딱 그랬을 것이다. ‘그리움도 한데 모이면 억세지는 것일까’라고 덧붙인 이유 또한 알 것 같다.

가을 억새는 10~11월에 절정을 이룬다. 남향하는 단풍이 보름 남짓 화려함을 뽐낸다면 북향하는 억새는 두 달 이상 무채색의 향연을 펼친다. 강원도 정선 민둥산이나 영남알프스의 밀양 사자평을 덮은 억새 빛깔은 유난히 곱다. 가을 햇살과 구름, 바람이 모여 만든 은회색 춤사위다. 포천 명성산과 창녕 화왕산, 장흥 천관산도 억새 명소다. 요즘은 청주 무심천과 제주도 산굼부리, 성이시돌목장,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까지 인산인해다.

억새라는 이름은 ‘억센 풀’에서 왔다고 한다. 9월에 꽃이 피고 곧 씨앗이 맺히면서 은빛을 띠기 시작한다. 이걸 흔히 억새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씨앗을 날려보내기 위해 수염 모양의 날개를 단 것이다. 잎과 줄기가 부딪쳐 서걱대는 소리를 내면 가을 정취가 한결 더해진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볏과에 속하는 초본식물이라 비슷하게 생겼다. 그러나 억새는 대부분 산과 들에 나고 갈대는 반수생식물이어서 습지나 강, 호수, 해변에 자란다. 억새 키는 1.2m 안팎으로 작고 갈대는 2~3m로 크다. 억새잎은 좁고 가운데에 흰 줄이 있는 반면 갈대잎은 넓고 대나무잎을 닮았다. 줄기도 갈대가 더 굵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지만 바람에 쉬이 흔들리는 것은 오히려 억새다.

해마다 이맘때면 억새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힐링’하러 갔다가 ‘킬링’된다는 우스개가 나돈다. 전문가들은 남보다 약간 일찍 가거나 늦게 오라고 권한다.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축제는 엊그제 끝났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라는 것이다. 안개 잦은 가을 산의 운해(雲海)에 고즈넉이 젖어보는 새벽 산행, 느긋하게 산에 올라 환상적인 ‘억새 노을’을 즐기고 천천히 내려오는 여유….

그러다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은 얼마나 애잔하고 설레는가. 우리도 그렇게 정일근 시인의 ‘가을 억새’처럼 별이 뜨는 능선에서 혼자 손 흔들고 싶을 때가 있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