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02일 19:22 자본 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국내 첫 사회성과연계채권(SIB) 사업이 좌초 위기에 몰렸다. 일부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반대로 본회의에서 관련 법안이 부결돼서다. 서울시가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의회에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은 탓에 법안을 파악하지 못한 시의원들의 반대 및 기권표가 쏟아진 탓이다. 서울시는 뒤늦게 시의원 설득 작업에 나선 뒤 다음달 본회의에 재상정키로 했지만, 통과 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퇴짜’ 맞은 1호 SIB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서울시의회는 지난달 30일 열린 본회의에서 서울시가 제출한 ‘그룹홈 아동 대상 사회성과보상사업 동의안’에 대해 찬성 38명, 반대 32명, 기권 9명으로 부결 처리했다.

SIB란 정책과제를 위탁받은 민간업체가 목표를 달성하면 정부로부터 관련 사업비에 이자를 더해 지급받되 실패하면 투자원금도 돌려받지 못하는 ‘성과급’ 형태의 재정집행 방식을 말한다.

서울시는 내년초 실시를 목표로 ‘그룹홈’(소외계층 청소년 5~7명을 묶어 관리인 보호 아래 거주하는 제도) 청소년들의 대인관계 형성 능력과 지능지수(IQ)를 끌어올리는 SIB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1대1 상담치료와 학습능력 향상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미래 취업 가능성을 끌어올리면 가난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명당 최소 1억5000만원(연간 기초생활수급비 및 관련 시설 운영비)의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게 이 프로젝트의 취지다.

서울시 입장에선 ‘손해볼 게 없는 장사’다. 목표만큼 IQ와 학습능력이 오르지 않으면 세금 한푼 안내도 되기 때문이다. 목표를 달성해 서울시가 사업비를 내주더라도 기초생활수급비 등 아끼는 세금이 더 많다.

SIB 법안은 지난달 22일 시의회 담당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하며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뜻밖에 본회의에서 ‘퇴짜’를 맞았다. 김용석 새누리당 시의원이 적극 반대하며 본회의장 분위기를 바꾼 여파였다. 김 의원은 이날 표결에 앞서 “SIB는 의미있는 사업이지만 첫 단추가 너무나 잘못 끼워졌다”며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평가대상으로 삼아 이들의 IQ가 얼마나 올랐는 지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한명희 새정치민주연합 시의원도 “취약계층 아동이 대기업의 어떤 조사사업이나 영업에 이용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박운기 시의원은 “두 의원이 앞다퉈 반대발언을 하자 SIB 시스템을 잘 모르는 의원들이 ‘당장 급한게 아니니 시간을 두고 검토하자’며 반대 및 기권표를 쏟아냈다”며 “오랜 기간 준비한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부결됐다”고 말했다.

◆우왕좌왕 서울시…늦어지는 ‘박원순式 복지’
금융투자업계에선 SIB법안이 부결된 이유로 서울시의 안일한 행정을 꼽는다. 기존 재정집행 방식과는 전혀 다른 SIB를 처음 도입하면서 시의회에 제대로 설명조차 안했다는 이유에서다. 상임위(보건복지위)만 통과하면 본회의는 별다른 이견 없이 통과될 것으로 보고, 전체 시의원에 대한 정책설명을 하지 않은 것. 그러다보니 그룹홈 SIB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시의원들의 무더기 반대 및 기권표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1호 SIB 사업을 이끌 운영업체(한국사회투자)와 사업비 14억원을 댈 민간투자자(대우증권)도 선정한 만큼 법안만 통과되면 곧바로 실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서울시가 의회 설득작업을 소홀히한 탓에 결과적으로 박원순 시장의 대표 공약을 새정치연합이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서울시의회가 부결시킨 셈이 됐다”고 말했다.

투자업계에선 ‘영국 미국처럼 교도소 범죄자가 아닌 왜 그룹홈 아동을 평가대상으로 삼았느냐’는 일부 시의원들의 지적에 대해 “SIB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오해”라고 설명한다.

SIB는 그냥 방치하면 중장기적으로 막대한 세금이 들어갈 뿐 아니라 사회의 불안요소가 될 수 있는 문제에 ‘조기 개입’함으로써 미래 비용을 아끼자는 취지인 만큼 아동을 대상으로 해야 효과가 크다. 실제 미국 솔트레이크시티는 저소득층 미취학아동의 취학후 보충교육 수업비를 줄이기 위해 이들에 대한 조기교육 SIB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에선 ‘아동 입양 SIB’와 ‘저소득층 청소년의 가정이탈 방지 SIB’가 진행되고 있고, 호주에선 6세 이하 아동의 가정이탈 방지 SIB가 운영중이다.

한국사회투자 관계자는 “1호 SIB는 그룹홈 청소년을 단순한 실험대상자로 삼는게 아니라 이들이 앞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라며 “서울시가 이번 사업에 대해 ‘좋은 효과를 냈다’는 식으로 자화자찬식 평가만 내놓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IQ 등 객관적인 평가지표를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개모집vs수의계약 논란
김용석 시의원이 SIB 법안에 반대하면서 내건 또 다른 이유는 운영기관 선정이 불투명했다는 것이다. SIB 관련 조례에 ‘운영기관 선정은 공개모집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됐는데도 서울시가 한국사회투자와 수의계약을 맺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서울시는 지난 2월 그룹홈 SIB 사업 모델을 제안한 한국사회투자와 사업 운영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맺었고, 한국사회투자는 이를 근거로 지난 7월 대우증권과 투자유치 MOU를 체결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김 시의원 등의 지적에 뒤늦게 한국사회투자와 맺은 MOU를 파기하고 공개모집으로 바꿨다. 한국사회투자는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뒤인 2012년 서울시 등이 추진하는 각종 사회적금융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김 시의원은 “한국사회투자는 서울시의회가 동의안을 심의하거나 공개모집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민간투자자를 모집하고 투자자와 MOU를 맺었다”며 “공개모집을 원칙으로 한 조례를 우습게 여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한국사회투자는 “SIB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나온 지적”이라고 반박한다. SIB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구조를 짠 한국사회투자에 아무런 인센티브를 주지 않은 채 운영자를 공개모집하면 앞으로 누가 새로운 형태의 SIB 사업을 제안하겠느냐는 것이다.

한국사회투자 관계자는 “정부가 사업 아이디어를 낸 뒤 이를 수행할 사업자를 모집한다면 공개모집이 맞지만, SIB 특성상 사업 아이디어와 모델은 민간이 개발해 정부에 제안할 수 밖에 없다”며 “이런 이유로 SIB 발원지인 영국도 소셜파이낸스 등 아이디어를 낸 곳과 사실상 수의계약한다”고 주장했다. 공개모집을 원칙으로 한 조례에 대해선 “SIB의 특성을 감안해 SIB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면 공개모집 이외의 방식으로 선정할 수 있도록 예외를 뒀다”며 “SIB뿐 아니라 어떤 프로젝트라도 사업 아이디어를 낸 곳에 인센티브를 주는 건 국제적인 관례”라고 강조했다. 김 시의원은 이에 대해 “그룹홈 SIB는 순수 민간 제안이 아닌 한국사회투자와 서울시가 함께 기획한 작품”이라며 “시험 출제자와 응시생이 미리 협의해 문제를 내고 시험을 치른 꼴”이라고 반박했다.

서울시는 앞으로 시의회 의원을 상대로 적극적인 설득작업에 들어갈 계획인 만큼 다음달 본회의 통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 시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이 여전히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만큼 통과 여부는 미지수다.

김 시의원은 “SIB제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룹홈 SIB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며 “서울시가 또다시 그룹홈 SIB를 상정시킬 경우 반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