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대신 '안전자산' 된 달러화…환율 논리 바뀌나
국제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던 일본 엔화의 역할이 온전히 미국 달러화로 넘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경제는 위기를 회복하며 위상이 달라진 반면 일본은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인위적인 엔화 약세를 부추길 수 밖에 없단 이유에서다.

금융투자업계에선 엔화 대신 달러화가 안전자산 역할을 맡게 되면 달러화, 신흥국 통화, 엔화, 유로화 순으로 통화 강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결국 지난 6년 간 금융시장을 지배했던 환율 결정 논리가 바뀌면서 달러화 강세가 심화되고 이에 따른 원화 약세도 계속될 것이란 설명이다.

◆ 글로벌 달러 강세 심화…원화 약세 폭 커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9월 이후 주요국 통화는 신흥국 통화 뿐 아니라 선진국 통화까지 달러화 대비 1.6%~8.6% 절하됐다.

그 가운데 원화의 달러화 대비 약세 강도가 다른 주요국에 비해 큰 상황. 원화보다 더 심한 약세를 보인 것은 러시아 루블화, 브라질 헤알화, 뉴질랜드 달러화 정도다.

전날 원·달러 환율은 1062.70원으로 급등해 최근 일주일 동안 20원 이상 올랐다. 이날도 상승세를 이어가 오전 10시19분 현재 원·달러 환율은 1063.35원을 기록했다.

전민규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국제외환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달러 강세'"라며 "미국의 양적 완화 축소와 조만간 이루어질 금리 인상이 달러 강세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이영원 HMC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양적 완화 조치가 종료되는 시점을 앞두고 지난 7월 이후 달러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는 자산매입의 종료 이후 현재 유지되고 있는 최저금리 정책의 변화까지 미 중앙은행 통화금융 정책의 기조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투자업계는 과거에도 미국이 양적 완화 축소나 금리 인상과 같은 통화정책으로 달러 강세를 불러온 적이 있지만 그때와 달라진 점은 엔화의 움직임이라는데 주목하고 있다.

전 연구원은 "지난해 5월 당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긴축을 예고하자 엔화는 강세를 보였다"며 "올해 7월 중순까지 무려 1년2개월 동안 거의 변동없이 강세 흐름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7월 이후 미국의 양적 완화 축소와 금리 인상 가능성이 높아진 국면인데도 작년과 달리 엔화가 빠르게 약세를 보인다는 게 그의 진단. 실제 7월 중순부터 이달 초까지 엔화가치는 달러 대비 7.7%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 연구원은 "7월 중순 이후 엔화의 움직임은 최근 수년 간 엔화가 보여왔던 움직임과는 반대"라며 "국제금융시장에서 더 이상 안전자산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앞서 2007년 7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증폭, 2012년 4월 스페인 은행 위기, 지난해 5월 미국 양적 완화 축소 발언과 신흥국 금융시장 불안, 10월 미국 연방정부 폐쇄 등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을 보일 때마다 엔화는 강세를 보여왔다.

이때마다 신흥국 통화는 달러화 대비 약세를 보였기 때문에 엔화는 신흥국 통화에 대해 이중 강세를 보였다. 이는 일본에 '안전통화의 저주'를 안겨주기도 했다.

전 연구원은 "지난 2개월 동안 환율 움직임은 달러화가 안전자산으로서 기존 엔화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며 "일본으로선 오히려 안전자산 굴레에서 벗어나 엔화 약세에 따른 경기 부양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안전통화 저주' 걸렸던 엔화…굴레 벗어날수도

달러화가 안전자산의 역할을 오롯이 맡게 되면서 글로벌 달러 강세 현상은 심화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이 연구원은 "금리 인상에 나서고자 하는 미국과 달리 유럽은 최근에도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표명한 바 있고 신흥국 역시 한국의 금리 인하를 포함한 완화적인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며 "당분간 달러 강세 기조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는 "달러 강세의 영향은 상품시장을 포함한 위험자산 전반의 조정을 야기하는 주 원인"이라며 "국내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연구원은 "원화의 경우 글로벌 달러 강세 영향은 물론 한국은행의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도 있다"며 "원·달러 환율은 연말 1070원 선 까지 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달러 강세가 지속되겠지만 그 강도나 속도는 다소 둔화될 것이란 시각도 있다.

배성진 현대증권 연구원은 "달러 상업용 순매도 포지션 비중이 2005년 이후 최고치에 근접했고, 실질금리가 완만한 상승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며 "무조건적인 달러 강세를 지지하는 방향보다는 조만간 속도 조절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한경닷컴 권민경 기자 k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