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막한 시장 > 28일 오후 서울의 한 전통시장에서 가게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과거 모피 의류로 명성을 얻었던 이 시장은 20년 전만 해도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도매시장이 열리는 새벽시간을 제외하면 3분의 2 이상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 적막한 시장 > 28일 오후 서울의 한 전통시장에서 가게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과거 모피 의류로 명성을 얻었던 이 시장은 20년 전만 해도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도매시장이 열리는 새벽시간을 제외하면 3분의 2 이상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이달 들어 개시조차 못했어요. 좀 팔아보려고 뜨개질 무료강습도 하는데 아무도 안 찾아옵니다. 아예 사람이 안 다니는데 무슨 장사가 되겠습니까.”(서울 구로동 구로시장 A뜨개방 사장)

지난 23일 찾아간 구로시장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시장 뒤편 한복집이 모여 있던 상가 골목엔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신 50~60대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이종운 구로시장 상인회장은 “200개 점포 가운데 40여개가 문을 닫았다”며 “주변에 있는 대형마트로 손님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복합쇼핑몰 안 된다” 집회는 하지만…

[침몰하는 자영업, 탈출구를 찾아라] "변화 주저하는 전통시장"…대형마트에 손님 뺏겨도 革新은 먼 일
같은 날 수원역 앞. 수원지역 22개 전통시장 상인으로 구성된 수원시상인연합회는 다음달 중 수원역 앞 롯데몰 개장을 앞두고 대규모 항의 집회를 열었다. 백화점·대형마트·영화관 등을 갖춘 연면적 23만㎡ 규모의 복합쇼핑몰이다.

김한중 수원시상인연합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지금의 AK플라자)이 들어선 지 10년 만에 남문(팔달문) 일대 상권이 완전히 초토화됐다”며 “애경보다 훨씬 규모가 큰 롯데몰까지 추가로 개점하면 수원 전통시장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들의 말처럼 전통시장에 가장 무서운 존재는 블랙홀처럼 손님을 빨아들이는 대형 유통점이다. 하지만 전통시장이 언제까지 대형마트·쇼핑몰 탓만 할 것이냐는 반론도 만만찮다. 내부 혁신과 제품·서비스 품질 개선을 통해 소비자의 발길을 되돌리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혁신과 투자는 꺼리는데…

천안역 바로 앞에 있는 천안공설시장은 좋은 입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를 끌어모으지 못하고 있다. 이 시장의 점포당 하루평균 매출은 50만원 정도. 평균 마진율 15%를 적용하면 하루 종일 일해도 7만원 정도를 번다는 얘기다. 한 상인은 “일부 상인이 리모델링 등 시장 개혁안을 제안해도 중장년층 상인들은 변화를 두려워해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며 “전통시장 개혁은 많은 상인의 동의와 적극성이 필요한 만큼 현실적인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통시장 내 자영업자 33만4400명 가운데 60대 이상은 33%에 달하고 평균 연령이 55세에 이른다.

변명식 장안대 유통물류학부 교수(중소기업혁신전략연구원장)는 “시장에서 30년 이상 장사하다 보니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편하게 느끼는 상인이 많다”며 “이런 상태에선 소비자의 발길을 잡을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매년 수천억원대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정부가 2002년 전통시장 활성화사업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총 3조50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전국 전통시장 매출은 2001년 40조1000억원에서 2013년 20조7000억원으로 거의 반토막(48%)이 나버렸다.

10, 20대를 끌어들이는 구리시장

반면 일부 전통시장은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틈바구니에서 굳건한 생존력을 보이고 있다. 상인들의 자구 노력이 시장을 지키는 원천이다. 구리전통시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장을 지탱하는 첫 번째 경쟁력은 ‘대박 점포’다. 메인 통로에 있는 ‘모아의류’가 그 전위대다. 이 가게는 매장 크기가 429㎡(약 130평)로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옷 종류가 3000여가지나 되는 대형 점포다. 한 달 평균 매출이 2억원에 이른다. 옷가지를 사 든 쇼핑객은 메인 통로 가운데를 차지한 노점상에서 떡볶이와 만두, 호빵 등을 사먹고 간다. 이규봉 모아의류 사장(51)은 “전통시장에서도 구리시장은 10~20대가 무리지어 몰려오는 희귀한 사례에 속할 것”이라며 “이들이 메인 통로의 분식집을 먹여 살린다”고 말했다.

상인회의 리더십도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박홍기 상인회장(52)은 구리시와 중소기업청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젊은 고객을 끌어오는 핵심 편의시설인 주차장을 마련했다. 여기에 지난해 말 구리시장의 각종 소식을 소비자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전통시장으로는 처음 개국한 ‘ICT 보이는 라디오방송국’도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시장과 소비자 간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달 27일엔 어린이중고시장을 개설하는 소식을 알리면서 어린이들이 직접 상인체험을 하는 이벤트도 벌이고 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서기열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