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한국 민주주의 디폴트 상태다
서구 사회가 민주체제로 전환한 것도 불과 100년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에야 그것의 부산물로서 패전국가들이 민주화됐다. 당시 민주체제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는 구시대의 상징이었고 터키 그리스 독일은 전쟁을 거치면서 왕정이 폐지됐다. 그렇게 자유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회주의 망령은 국민국가 속에서 더욱 강력하게 되살아났다. 극우를 전쟁사회주의라고 부른다면 20세기는 사회주의 전성기였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국가는 사회주의를 만들어냈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리니즘은 모두 20세기 사회주의 질병이다. ‘악한 그들’과 ‘선한 인민’으로 양분된 사회에서 선한 인민을 대리하는 지도자들이 출현했고, 국민이 박수갈채를 보내면 독재국가가 태어난다. 1, 2차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들의 총력전은 국민이 주권자가 됐을 때 나타난 결과였다. 이것이 20세기다.

민주주의를 악으로 묘사하는 것이냐고? 그렇다. 민주주의는 부덕과 악덕, 게으름과 책임 전가, 심지어 타인 재산에 대한 약탈과 몰수를 부추긴다. 법인세와 소득세에 대한, 다시 말해 타인의 것에 대한 대중의 타오르는 약탈적 욕구를 생각해보라. 아니 90%의 몰수적 소득세를 주장하는 피케티를 환영하는 한국을 보라. 10대들이 뭔가 나쁜 일을 당했다는 뜻으로 “민주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대중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정당화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복지 논리도 그렇다. 오늘의 소비를 내일로 미뤄두는 절제와 인내가 문명의 본질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런 문명적 특성을 여지없이 공격한다. 미래를 할인해 오늘 소비하는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경쟁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것에 복지국가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복지국가는 치명적 현대병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아시아에도 민주정치가 이식됐다. 그러나 벌써 죽고 말았다. 북한이 독재로 치달아간 것은 민주주의의 태생과 운명을 잘 보여준다. 문화혁명도 킬링필드도 뿌리는 같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악의 본능이다. 옛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후쿠야마는 역사(사회주의)는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틀렸다. 사회주의는 죽지 않았다.

한국이 산업화혁명에 이어 민주화 시민혁명을 완수했다고 선언하던 1987년 체제는 27년 만에 부도 상태다. 가장 평화롭게 국가적 의사결정을 만들어 내는 체제라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러나 정치라는 이름을 빌려 도덕적 파탄을 정당화하는 체제에 불과하다는 진실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가 확인한 것은 민주주의는 국민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이다. 정치라는 간판만 달면 불법도 억지도 심지어 거짓말도 정당화된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은 보험사기도, 아파트 난방비 도둑질도 집단이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 없이 감행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인이 이렇게 뻔뻔해진 것은 민주주의 때문일 것이다.

정치는 아직 1987년의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아니 길거리를 전전하고 싸우고 확성기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책상을 뒤엎고 멱살을 잡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하는 건달들이 정치를 점령하고 있다. 수십일을 단식해도 한국인은 전혀 건강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특이체질이라는 것도 입증됐다. 극단적으로 투쟁할수록 이긴다는 게임 규칙은 살아 있다. 그리고 피해자이기만 하면 그 어떤 월권적 요구도 정당화된다. 단체들은 자신들의 대표로 얼굴에 철판을 깐 비정상적 인간들을 선출한다. 대학도 의사도 변호사도 언론도 단체대표는 그런 저질로 채워진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죽어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민주주의를 말할 때 민주주의는 인민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명박 정부가 동반성장,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내걸면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외피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주의는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민주주의다. 국민은 정치에 중독돼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