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명인’ 김영준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태극문양의 나전회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옻칠 명인’ 김영준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태극문양의 나전회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한 지난달 18일. 교황이 앉은 커다란 옻칠 자개 의자가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근면한 교황의 성품을 반영해 제작한 이 의자는 한국의 전통 나전칠기에 현대적 디자인을 접목한 새로운 옻칠 문화를 보여줬기 때문. 김영준 씨(55)가 경기 연천 ‘화요일아침예술학교’ 교장인 홍문택 신부의 부탁으로 6개월 동안 수십 번의 수정과 보완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다.

‘옻칠 명인’인 김씨가 22일부터 내달 3일까지 서울 중림동 한경갤러리에서 한국경제신문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빛으로의 포옹’을 주제로 초대전을 연다. 하늘과 별, 태양 등 우주의 신비를 추상 화법으로 제작한 나전회화를 비롯해 옻칠공예, 아트상품, 패션디자이너 정수연 씨와 공동 작업한 설치 작품, 자개로 만든 어보 등 60여점을 선보인다. 자연의 진주, 전복, 소라 등 30여개의 조개류에서 가공된 서로 다른 자개 빛이 인공조명과 만나 새로운 빛을 빚어내는 세상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한때 증권맨(옛 동서증권)이었던 김씨는 지난 20년간 나전칠기 공예분야에 매진하면서 나전공예품을 생산하는 국보칠기와 국보옻칠연구소를 운영하며 칠기 문화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공예와 미술의 경계에서 전통 회화의 격렬한 색채감을 접붙여 ‘나전 회화’의 영역을 넓히는 한편 유명 디자이너와 컬래버레이션(협업)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경기 포천 소흘읍에 마련된 공방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는 김씨는 “자개의 오묘함에 빠져 몸부림친 20여년을 생각해보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전통 자개 공예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애틋한 감성을 자연과 응축시켜 화면에 녹여냈다”고 말했다. 그에게 나전회화는 석공이 돌을 쪼듯 아름다움을 새기는 희망의 작업이다. 나무판 앞에 앉아 ‘색채의 마술사’처럼 우주와 자연을 채색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인생살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과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녹슬고 얼룩진, 음습하고 축축한 이야기보다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다. 작업 주제 역시 ‘빛에 대한 단상’이다.

김씨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동서증권에 입사하며 꿈을 잠시 접어뒀던 그는 1994년 용기를 내 사표를 썼다. 그는 퇴직금 중 500만원을 들고 디자인을 배우러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갔다. 이유는 분명했다. 시들고 있던 나전칠기를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2년 반 만에 귀국한 그는 디자인 공부를 바탕으로 나전칠기에 도전했지만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아파트 문화에서 나전칠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찾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일부 안목 있는 외국인들이 웰빙 인테리어로 관심을 가졌다. 2008년 빌 게이츠가 VIP 선물용으로 나전칠기 ‘엑스박스’ 100개를 주문해 세계 명사들에게 선물한 게 기폭제가 됐다.

이화여대 디자인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씨는 나전칠기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해외 전시를 줄줄이 계획하고 있다. 오는 10월 홍콩 바이어박람회 참가를 시작으로 11월 말레이시아 셸오일 회장 후원으로 말레이시아 관광청에서 전시회를 열고, 12월엔 상하이 아트페어에 작품을 출품할 예정이다.

김씨는 이번 전시회 수익금 일부를 고향인 철원 지역 군부대 장병과 연천 ‘화요일아침예술학교’ 지원에 쓸 예정이다. (02)360-423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