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백효 소장이 19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해동경사연구소에서 송나라 유학자 정명도의 추일우성(秋日偶成)이라는 시(詩)를 들어보이며 그 속에 담긴 뜻을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성백효 소장이 19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해동경사연구소에서 송나라 유학자 정명도의 추일우성(秋日偶成)이라는 시(詩)를 들어보이며 그 속에 담긴 뜻을 설명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이런 데 나오는 게 영 어색해서…익숙지가 않네요.”

인터뷰 사진을 찍는 동안 백발의 학자는 카메라 렌즈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입가의 미소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성백효 해동경사연구소 소장(69)은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 서울대 졸업식에 간 것도 아니고 나같이 책이나 읽는 사람이 신문에 나와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며 겸손해 했다.

지난 8월28일 제68회 졸업식이 열린 서울대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 행사가 시작되고 졸업 축사 순서에 백발의 노학자가 하얀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단상에 오르자 장내가 술렁였다. 그가 “한학자(漢學者) 성백효입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 딱히 신분을 밝힐 만한 학위 같은 것이 없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라고 입을 떼자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외국 대학 총장, 노벨상 수상자들이 축사자로 나섰던 서울대 졸업식에 한학자가 나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 소장은 약 60년간 중국과 한국의 고전 등을 공부하고 연구한 이 분야의 대가다. 국내 최초로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등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해설서를 모두 번역하는 등 한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명한 한학자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17년간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이철수 서울대 기획처장, 노환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변호사 등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한학을 가르친 ‘훈장님’이기도 하다.

한글도 안 가르친 한학자 아버지

[人사이드 人터뷰] "논어 60년 공부했지만 볼 때마다 새로워요"
성 소장은 194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른바 ‘해방둥이’다.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공부했던 그의 아버지는 성 소장이 열 살이 됐는데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네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한문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지만 성 소장이 학교에 가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의 집이 그를 학교에 보내지 못할 만큼 곤궁해서가 아니었다. 이른바 ‘신식학문’에 대한 아버지의 완고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성 소장은 “아버지는 신식학문을 배우면 출세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안 된다는 게 지론이었다”며 “사람의 도리를 깨치는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당장 주변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말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식 망칠 일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 소장의 아버지는 완고했다. 본인이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서당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 소장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전북 익산의 유명한 한학자였던 월곡(月谷) 황경연 선생에게 아들을 맡겼다. 성 소장은 “아버지는 한자에 한글로 음을 달아놓으면 한자가 제대로 외워지지 않고 뜻이 새겨지지 않는다며 내게 한글도 못 배우게 했을 정도”라며 “나는 동네에 배달되는 신문을 몰래 보며 한글을 익혔다”고 회상했다.

‘학교에 안 보내준 것이 서운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덕에 평생 공부할 수 있게 돼서 고맙다”며 “학교를 갔다면 고교에서 학업이 끝났을지 대학에서 끝났을지 모르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방황 끝 상경…연구 물 만나

열여덟 살에 찾아간 스승은 성 소장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스승을 찾아 한학의 대가 서암(瑞巖) 김희진 선생 문하에서 공부했지만 머릿속에 잡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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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장은 “공부가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주경야독(晝耕夜讀)도 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한동안 방황했다”고 했다. 공부보다는 농사꾼으로 살아보려고 동생과 함께 농사를 지어보기도 하고 농촌지도자로 활동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정고시 책을 펼쳐보기도 했지만 곧 그만뒀다. 본인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그는 1977년 서른세 살 되던 해에 전환점을 맞았다. 신문에 당시 중국과 한국의 고전을 연구하는 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본 후 상경한 것이다. 이 단체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학계 및 문화계 원로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선생 등이었다.

이곳에서 성 소장은 학자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학생으로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전문위원으로 채용됐고 이후 약 2년간 강의를 맡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성 소장은 “이미 20여년간 고전을 읽은 것이 어느 정도 수준에 와 있었지 않았나 싶다”며 “당시 추진회 강의는 원로들만 했는데 교수 중 30대는 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성 소장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한한(漢韓)대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했다. 이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국방군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시대에 한문으로 발간된 병서(兵書)나 군대에 관한 기록을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2012년까지 한국고전번역원 교수로 강의도 계속했다. 2007년 고전 연구와 강의를 위한 연구소인 해동경사연구소를 만들어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성 소장은 “서울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은 지방에서 못 보는 책들을 정말 많이 읽은 것”이라고 했다.

후학 위한 지침서 주력

성 소장의 이름이 알려지자 서울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논어 맹자를 비롯해 중국 역사서인 통감 등 한학을 강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학생들이 참고할 만한 번역서가 없느냐는 문의도 잇따랐다. 1980년대 말부터 성 소장이 후학들을 위해 고전 번역에 나선 이유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쓴 논어 해설서인 논어집주의 번역을 3년간의 작업을 통해 1990년 국내 최초로 마치자 욕심이 생겼다. 맹자 대학 중용 등 이른바 ‘사서’의 해설서 번역을 넘어 시경 서경 주역 등 ‘삼경’의 해설서 번역에까지 나선 것이다. 국내에서는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원로 학자들보다 젊은 내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이 일만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역까지 마치니 17년이 지났더군요.” 이 해설서 번역본들은 가장 원전에 충실한 번역서로 인정받아 10만부 이상 팔린 한학계의 ‘베스트셀러’이자 국내 한학연구의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는 학자로서 본인의 의견을 넣은 책을 쓰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작년 논어집주에 다시 일일이 각주를 달고 성 소장 개인의 평가와 해석을 더한 ‘부안설(附按說) 논어집주’를 발간했다. 성 소장은 “맹자집주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며 “5년 안에 사서삼경에 대한 부안설 집주 집필은 물론 오경(五經)에 포함되는 예기(禮記)와 춘추좌전(春秋左傳)까지 번역해 후학을 위한 지침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성 소장이 말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그는 “기력이 있는 한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 소장은 논어를 예로 들며 “60여년을 보던 논어인데도 볼 때마다 미처 알지 못한 뜻을 깨칠 때도 있고 볼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또 젊은 학자들이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옛날 유학자들은 휴일도 없이 밤낮 공부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요즘 젊은 학자들은 비판은 잘하지만 한문 실력이 부족해 진정한 뜻을 새기는 데 모자란 부분이 있는 데다 성현들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월호 사고…고전 교육 소홀히 한 결과

조용히 말을 이어가던 성 소장은 교육의 문제점을 묻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참사, 군 폭력사건 등의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 고전교육이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논어니, 맹자니, 명심보감이니 하는 한문이나 고전교육의 핵심은 바로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며 “인(仁)과 예(禮)가 가장 큰 규범이던 옛날에도 죄를 짓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교육이 부실한 지금 상황에서 도덕적인 인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비판했다.

성 소장은 세월호 참사 등에 우리 사회가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세월호 참사는 바닥에 떨어진 도덕 교육의 결정판”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남을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쳐 온 가정이나 학교가 먼저 반성해야지 교육부나 국방부 장관이 머리 숙이고 책임진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에서 한자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자를 배워 성현과 선조들의 정신이나 도의를 알아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 소장은 “아무도 찾지 않아 몇 달이나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되는 고독사 노인들이나 곤궁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고 되물었다.

학문의 대를 잇지는 못했다. 그는 슬하에 2남3녀를 뒀다. 첫째 아들만이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문을 전공했지만 한학자로 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자식이 하나라도 있길 바랐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며 “앞으로 소원이 있다면 삶이 허락하는 한 계속 글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