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대리기사
대리운전 기사들을 가장 맥 빠지게 하는 것은 ‘길빵’이다. 길에서 기다리는 자신의 손님을 즉석 대리기사에게 빼앗기는 경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절박한 처지여서 한 명이라도 놓치면 속이 바짝바짝 탄다. 생명과도 같은 시간까지 빼앗기니 미칠 노릇이다. 반대로 자신이 응답한 콜을 취소하게 되면 그때마다 벌금 500원을 알선업체에 내야 한다. 밑바닥 인생의 비애다. 그런데도 밤마다 도시 곳곳으로 수백명씩 몰려든다.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서울 강남구 교보타워사거리와 마포구 합정역사거리, 노원구 상계동 노원역사거리 등 ‘대리사거리’. ‘대리콜’을 빠르게 검색하는 그들의 눈빛은 초조하다. 남보다 빨리 콜을 눌러야 주문을 따기 때문이다. 대리콜 앱 이용료를 월 5만원씩 내지만, 이 ‘무기’가 있어야 전투를 치르니 아까워할 수도 없다. 보험료 또한 월 8만5000원씩 내야 한다. 알선업체에는 수입의 20%를 떼어준다. 이게 최소한의 생존 요건이다.

밤새 옮겨다니는 신세여서 교통비가 제일 부담스럽다. 한 번에 4000원 이상 지출하지 않는 게 철칙이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합승한다. 웬만한 거리는 뛰고 걷는다. ‘셔틀버스’가 있는 구간이면 무조건 잡아탄다. 요금 2000~4000원선인 셔틀버스는 심야에 서울·수도권 대리기사들을 태워다 주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대리요금은 철저하게 수요·공급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공급이 늘면서 바가지 요금은 거의 사라졌다. 서울 시내에서 구(區)를 벗어나지 않을 때는 1만원, 조금 더 가면 1만5000원, 동서 축을 오갈 때는 2만여원이다. 경쟁이 심해져서 ‘서울시내 무조건 9000원’이라고 적힌 전단까지 등장했다. 분당이나 용인, 수원 등으로 갈 땐 3만원이 넘는다.

대리기사의 절반 이상은 ‘투잡족’이다. 삭감된 연봉을 채우기 위해 밤낮없이 뛰는 직장인,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실직자, 수입을 보충하려는 자영업자, 새 일거리를 찾는 정년퇴직자, 취업하지 못한 젊은이 등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선택하는 게 대리운전이다. 가장 힘든 일은 만취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다. 막말과 욕설, 행패 때문에 속앓이도 많이 한다. 그러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그저께 새벽에는 50대 대리기사가 술 취한 세월호 가족대책위원장 등 유가족 5명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들이 진짜 약자를 마구 짓밟고, 말리는 행인들까지 두들겨 팼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