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구로공단 50년
“서울 근교에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지역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재일동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들여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1964년 일본을 돌아보고 온 이원만 한국나이론공업협회장(코오롱 창업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요지다. 곧바로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생기고 수출산업공단단지개발조성법이 제정됐다. 그 결과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인 구로공단이 탄생했다.

당시 구로동은 논밭과 야산, 난민촌으로 이뤄진 변두리 지역이었다. 국유지가 많아 정부가 현물로 출자하거나 싼 값에 땅을 제공할 수 있었고, 서울 중심가와 가까운 지리적 장점도 있었다. 가장 먼저 입주한 동남전기는 시운전과 동시에 공장을 돌리며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TV를 생산했다. 자전소설 ‘외딴방’을 쓴 소설가 신경숙 씨도 나중에 이 회사에서 일하며 밤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했다. 그의 나이 17세부터 19세까지였다.

당시 가리봉동 일대의 여공들은 월세 3만원짜리 쪽방에서 2~3명이 함께 생활했다. 낮·밤 근무조가 ‘이부제 셋방’을 나눠 쓰며 ‘라보때(라면으로 보통 때운다)’라는 말까지 유행시킨 이들은 구로공단 개발사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생산한 스웨터와 가발, 신발, 봉제품, 전기제품 등이 세계를 누빈 덕분에 1977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국가 전체 수출의 1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부침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국제 유가파동에 따른 수출 침체와 노사분규, 채산성 악화 등이 겹쳤고 노동집약산업의 한계로 고용과 수출이 반토막났다. 이른바 경공업 선도 공단의 수명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번 상전벽해의 변신에 성공한 구로공단은 2000년 정보기술(IT) 첨단밸리로 거듭났다.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꿨다. 빨간 지붕의 굴뚝 공장들은 첨단산업과 패션의 메카로 탈바꿈했고, 여공들의 자리는 넥타이를 맨 직장인과 연구원들로 채워졌다. 50주년을 맞은 지금은 107개 지식산업센터에 1만1911개사, 16만2000여명이 일하는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그 치열한 성장 과정은 우리 경제사와 비슷하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국가 재건의 기틀을 한창 다지던 1964년, 1억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액은 5600억달러로 늘었다. “한국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무하다”던 비아냥을 딛고 우리는 최빈국에서 세계 6위 수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때 경제부강(經濟富强)을 기치로 내걸고 함께 출발한 한국경제신문도 올해 창간 50주년을 맞았다. 기적의 꽃을 피워올린 두 주역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