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디플레이션 함정보다 걱정해야 할 것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국가처럼 한국도 디플레이션과 싸울 때라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최근 발언 이후 디플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낮은 물가는 불경기를 부른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디플레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통화량을 늘려 인플레이션을 조성해야 한다는 게 반(反)디플레 논리다. 서구 주요 나라가 공격적으로 통화 완화 정책을 펴는 이유도 그런 논리에 근거한다.

반디플레론자들은 여러 논거를 들어 디플레가 불황을 야기한다는 인식을 제공하지만 그 논거들은 취약하기만 하다. 가격이 하락하면 소비자들은 장차 더 낮은 가격을 기대하고 소비를 뒤로 미루기 때문에 소비재 판매가 감소하며 그 결과가 불경기라고 한다. 그러나 그 논리는 궁색하다. 가격이 하락해도 기업, 개인은 재화와 서비스 구입을 줄이지 않는다. 1998년 초 이후 컴퓨터 값이 93%나 하락했을 때 구입 지출은 2700%나 증가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가격이 하락하면 이윤이 줄어들고 투자도 위축된다는 논리도 그럴 듯하지만 이는 기업가정신에 대한 기계적 해석이기 때문에 틀렸다. 이윤이 낮게 예상되면 값싼 생산요소를 찾거나 기술개발 등 생산비용을 낮추는 방법을 찾는 게 기업가정신이다. 생산성 향상으로 값싸게 생산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 정보기술(IT) 산업처럼 가격 하락과 함께 경제가 성장해 소비대중에게 보편적 편익을 안겨주는 게 자본주의의 역사요, 발전 원리라는 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독일, 미국에서 디플레의 그런 매혹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사회주의 이론은 틀렸으니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게 독일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에드워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아니던가.

이제는 우리가 디플레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야 할 때임에도 디플레는 실업을 야기하지 않느냐고 아직도 고집 부린다. 판매 가격은 자유로이 내려갈 수 있지만, 임금은 경직적이고 그래서 가격 하락은 기업의 손실과 실업을 야기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임금의 경직성은 노동조합, 최저임금제, 정규직 과보호 등과 같은 규제 때문이고 이게 실업의 주범이다. 실업의 원인은 디플레가 아니라 규제인 것이다.

이쯤에서만 봐도 경제 사정이 어렵다고 디플레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불경기를 야기하는가. 그 원인은 통화량을 늘려 인위적으로 조성한 인플레라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탁월한 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닛 옐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 인플레를 좋아하는 반디플레론자의 귀에는 거슬리겠지만, 2008년 금융위기와 1929년 대공황의 발단이 보여주듯이 저축의 뒷받침 없는 통화량 확대는 이자의 왜곡과 잘못된 투자로 이어져 거품만 만들 뿐 불경기가 그 필연이다. 그런 불황에서 신용대출이 억제되고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줄이거나 화폐 수요가 증가하면 물가도 하락하는데 이게 ‘진정한’ 디플레다. 따라서 그런 디플레는 통화 증발에 따른 과거의 인플레에 대한 반응이요, 경제를 정상적인 상황으로 되돌리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新)경제사가들도 불경기는 디플레보다는 인플레와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플레는 파괴적이다. 2%의 낮은 인플레라고 해도 30년만 계속되면 화폐가치가 반토막으로 줄어든다. 주지하다시피 빈자에게서 부자에게로 소득을 이전하는 주범도 인플레다.

신용 창출 축소에 따른 디플레가 점잖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디플레도 수많은 사람을 어렵게 만든다. 소득이 줄어들고 빚 갚기가 어려워진 가계도 속출하고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하는 기업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그런 고통은 저축의 뒷받침 없이도 신용 창출을 무제한 허용해 인플레에 친화적으로 작동하는 그래서 아주 잘못된 통화제도의 업보(業報)라는 걸 주지해야 한다. 따라서 불경기 극복을 위한 근원적 해법은 신용 팽창을 막아내 자유를 수호하는 통화제도의 확립이다. 그런 제도에서만이 모든 사람이 보편적 편익을 향유할 수 있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 명예교수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