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부산 해운대 부산영화촬영소에서 형 곽경택 감독(오른쪽)과 동생 곽규택 변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3일 부산 해운대 부산영화촬영소에서 형 곽경택 감독(오른쪽)과 동생 곽규택 변호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행님. 진짜 괘안나? 내 안 가도 되나?”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은 2002년 다급하게 걸려온 동생의 전화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전 해 ‘친구’로 800만명의 유례 없는 흥행 기록을 세우며 스타 감독이 됐지만 성공이 ‘독’으로 돌아왔다. 영화의 모델인 조직폭력배 간에 일어난 금품 갈취 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써 부산지검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곽규택 변호사(당시 검사)는 미국 연수 중에 이 소식을 접했다. 다급한 마음에 “당장 들어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형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였다. “니가 검사장도 아니고 들어와서 우짤기고? 됐다. 잘못한 것 없는데 빵(감옥)에 가면 그거로 또 영화 만들면 된다.” 형을 믿은 동생은 긴말 하지 않았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하나였던 형제는 올해 고향인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하반기 개봉 예정인 영화 ‘극비수사’ 촬영이 한창인 곽 감독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 사건 수사 이후 전주지검을 끝으로 부산에서 최근 개업한 곽 변호사(전 부장검사)가 그 주인공이다. 늦은 밤 부산 해운대 앞 노천 식당에서 영화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들을 만났다.

피란민 2세대로 자란 형제

곽 감독은 “규택이와 다섯 살 터울이지만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남달리 친했다”고 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1·4 후퇴 때 열일곱 살의 나이로 피란선을 타고 홀로 부산항에 도착했다. 낯선 땅에서 먼저 피란을 떠난 둘째 형을 우연히 만나 서로 버팀목 삼아 삶을 일궜다. 만년필 장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는 형의 도움으로 의대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전남 목포에서 가난을 피해 부산으로 온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곽 변호사는 “개업할 돈이 없어 8년간 군의관 생활을 하셨다”며 “어머니의 희생적인 뒷바라지 속에 38세 되던 해 부산 남포동에서 늦깎이 피부과 의사로 개업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쟁취한 일에 누구보다 애정을 가졌던 아버지는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비상한 편이었다. 부산고에 입학한 곽 감독은 2학년 때까지 성적이 곧잘 나왔다. 그러나 사진부에 들어가면서 성적이 고꾸라졌다. 한창 공부할 시기에 수업만 마치면 사진을 찍으려고 동네를 쏘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첫 학력고사는 실패했다. 정신을 차리고 재수한 끝에 아버지 뒤를 따라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좀처럼 흥미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애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3학년을 마치고 집에 상의도 않고 자퇴했어요. 그리고 아버지 병원을 찾아가 ‘학교 때려치웠다. CF감독이 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죠. 하하, 남포동 길 한복판에서 정말이지 먼지나게 맞았어요.”

곽 감독은 이후 스물여섯 살에 미국 뉴욕대(NYU)로 유학을 떠났다. CF 촬영을 배우려던 계획과는 달리 그곳에서 ‘영화’라는 장르에 눈을 떴다. 또 한 번의 승부수가 필요했다. 서울 충무로 바닥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영화감독은 꿈도 못 꿀 때였다.

동생 곽 변호사는 줄곧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냥 ‘범생이’는 아니었다. 시위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부산 혜광고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던 1987년 학교 주변에서는 “‘짭새(경찰)’한테 잡힐 뻔했다”는 선배들의 귀엣말이 수시로 들렸고, 가끔 최루탄 연기도 맡았다. 사회에는 민주주의가 꿈틀대는데 학생회장을 선거로 뽑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는 나서서 학생회장 직선제 도입 운동을 펼쳤고 모교에 첫 직선제를 도입하는 쾌거를 이뤘다. 내친김에 ‘매점 과자값 인하’를 내걸고 후보로 출마했다. 곽 감독을 비롯해 온 가족이 연설문을 붙들고 글귀를 고쳤다.

“운동장 단상에 섰는데 저 멀리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거예요. 연설문을 잠시 잊고 당시 유행가인 ‘저 바다에 누워’를 큰 소리로 불러 젖혔습니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띱띠리 딥디디비디비딥!’ 하고요. 전교생이 열광했고, 그렇게 학생회장이 됐죠. 부산 사나이답지예.”

‘줄’ 없이 성공을 꿈꾸다

[형제의 대화] "평생 즐길 수 있는 일 찾아라" 아버지 말씀에 兄은 의대 접고 영화감독, 동생은 법조인 길로
부산에서는 수재로 통하며 서울대 법대까지 진학한 곽 변호사였지만 그곳엔 ‘더 잘난 사람’이 많았다. “장관 딸, 대기업 오너 아들, 대법관 아들이란 사람들이 많아 기가 팍 죽었죠. 이왕 아무것도 없이 온 거 끝까지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곽 변호사)

굳은 다짐 때문이었을까.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한 그는 2년 만에 시험을 통과, 스물셋에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연수원 입소 전 먼저 달려간 곳은 형님이 유학 중이던 미국 뉴욕이었다. “같이 한 달 동안 맨해튼 한복판을 거닐며 둘만의 시간을 보냈어요. 황금기였죠.”(곽 감독)

곽 변호사는 검사의 길을 택했다. 법무부 국제형사과 근무 당시 ‘BBK 의혹’으로 인해 대선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김경준 송환 작전’을 맡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조직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송환 날짜를 몇 번씩 바꾸고, 비행기 속에 승무원들이 지내는 ‘벙커’라는 곳을 겨우 찾아 거기에 몰래 숨겨 무사히 데려왔지요. 덕분에 비행기까지 따라 탔던 많은 기자에게 욕 좀 먹었죠.”

곽 감독도 국내로 돌아와 데뷔작 ‘억수탕’으로 영화계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충무로에서 조감독 한 번 안 해본 놈이 외국물 좀 먹고 까분다’며 대놓고 그를 따돌렸다. 장비 대여를 승인하는 촬영·조명 협회에서는 일부러 장비를 내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제작비를 아끼려고 경찰관 역할엔 곽 변호사를 썼고, 필름 현상을 해주지 않으려는 현상소에서는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 다행히 곽 감독의 재능을 알아본 ‘모래시계’의 김종학 감독으로부터 나름 큰 액수를 투자받을 수 있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곽 감독은 이름을 알리며 자신감을 얻었다. 차인표·김혜수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캐스팅해 차기작 ‘닥터K’를 내놓았지만 결과는 또다시 흥행 참패였다. 혹평이 쏟아졌다.

영화 ‘친구’는 그에게 마지막 도전이었다. 부산 사나이들의 투박하고 거친 세계, 자신의 색깔에 꼭 맞는 장르 같았다. 하지만 또 실패하면 더 이상 투자받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곽 감독은 동생에게 “마지막 영화가 될 수 있다”며 법률적 조언을 구했다.

당시 천안지청에 부임했던 곽 변호사는 형의 마지막 영화가 될 수도 있는 ‘친구’ 관람표 100장을 자비로 사서 후배 검사와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개봉 첫날에는 부산의 한 극장 앞에 서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망을 봤다. 다행히 관객들의 표정은 밝았다. ‘마이 무따 아이가’ ‘내가 니 시다바리가’ 등 곧 전국적으로 유행을 탈 정겨운 사투리 대사들을 읊조리며 웃고 있었다.

첫날 개봉관의 뜨거운 호응은 전국으로 퍼졌다. 유학파 출신, 30대 초반 나이의 젊은 감독은 순식간에 영화계 판도를 바꿔 놓으며 국내 대표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곽 감독은 ‘챔피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태풍’ 등 흥행작을 잇따라 내놓으며 승승장구했다.

곽 변호사도 조직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2013년 검찰의 꽃이라는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갑의 횡포’로 알려진 남양유업 밀어내기 사건과 신세계 계열사의 불법 몰아주기 사건 등을 처리하면서 더욱 이름을 알렸지만, 하반기 새로 배당된 사건은 눈앞을 캄캄하게 했다. 지난해 가장 큰 논란에 휩싸였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과 관련한 명예훼손 고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직의 머리를 치는 수사라…영 감이 안 좋다”고 했다.

곽 변호사는 압수수색에서 채 전 총장과 내연녀로 지목된 임 여인, 아들 채모군 셋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아, 이랬던 거였구나…’라는 탄식이 나왔다. 그는 “슬픈 수사였다”며 말을 아꼈다. 이후 전주지검 부장검사로 발령난 그는 얼마 안돼 사표를 던졌다. “검사의 즐거움은 다 맛봤으니, 더 늦기 전에 부산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삶을 긍정하며 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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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과 검사, 서로 다른 삶을 살던 형제는 요즘 부산시내 도보 5분 거리에서 지내며 자주 얼굴을 맞댄다. 곽 변호사는 이야기꾼인 형을 따라 자서전 ‘검사의 락(樂)’을 펴냈고, 곽 감독은 지난해 ‘친구2’ 이후 차기작인 ‘극비수사’에서 동생이 겪었을 법한 치열한 수사 이야기를 그리는 중이다. 새 영화는 강력계 형사(김윤석 분)와 도사(유해진 분)가 손잡고 실종된 소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스터리 수사극이다. 1970년대 말 부산에서 일어난 여고생 실종사건 실화를 토대로 만든 것이다.

“수사 실화다 보니 검사 출신 동생 도움을 많이 받고 있네요. 사실 검사가 하는 일이나 감독이 하는 일이 각본을 짜고 인물을 고르고 퍼즐을 맞춰 나가는 ‘시나리오 작업’이란 면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곽 감독)

“검사를 그만두는 데 아쉬움도 많았지만, 형님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많아져 좋은 게 더 많아요. 다음에는 제가 담당했던 BBK 김경준 송환 작전을 소재로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곽 변호사)

형제가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두 가지 메시지는 ‘긍정’과 ‘도전’이다. 곽 변호사는 “아무 밑천도 없는 피난민 2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매 순간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며 “긍정적 태도를 잃지 않는 한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곽 감독은 “영화판 텃세가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친구’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처음 가는 길이 고통스럽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 보라”고 조언했다.

부산=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