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는 2일 고급 면도기 신제품 ‘9000시리즈’를 선보였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필립스는 2일 고급 면도기 신제품 ‘9000시리즈’를 선보였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한국 남성들은 프리미엄 면도기 수요가 높습니다. 면도기를 ‘남성의 품격’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인식하는 분이 많기 때문이죠.”

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필립스의 전기면도기 ‘9000 시리즈’ 출시 행사. 이 제품은 필립스가 4년 만에 내놓은 고급 전기면도기다. 가격이 30만~60만원대로, 이전 고급 모델 ‘센소터치’보다 10만원가량 높아졌다. 세계 최초 여덟 방향으로 움직이는 헤드를 비롯해 V자 면도날, 자동 살균·건조, 세안 기능 등 최신 사양을 내세웠다.

남자는 면도하는 데 평생 3000시간을 쓴다고 한다. ‘한국 남자의 3000시간’에 쓰이는 전기면도기 시장은 외국계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GfK가 집계한 지난해 국내 전기면도기 시장 규모는 826억원. 필립스가 70%대 점유율로 1위이고 브라운과 파나소닉이 뒤를 잇고 있다.

장진석 필립스코리아 차장은 “한국은 필립스 면도기 진출국 중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라며 “특히 고급 모델의 판매량은 전 세계 4위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전기면도기 시장에선 대기업을 포함해 국내 업체 10여개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은 구조조정 차원에서 모두 손을 뗐고, 중소기업들은 자금난을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졌다.

토종 업체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조아스전자마저 지난 7월 설립 32년 만에 부도를 냈다. 전기면도기 시장은 이제 완전히 외국계 기업의 경쟁구도가 됐다. 조아스전자는 애프터서비스 등을 일부 재개했지만 여전히 파행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전문가들은 국내 전기면도기 업체들이 전멸하게 된 원인은 결국 ‘경쟁력 부족’이라고 분석한다. 소비자들은 브랜드 파워가 있는 고급 제품을 원하는데, 업체들은 혁신적인 기술 개발에 소홀한 채 중저가로만 승부했다는 것이다.

김영은 옥션 카테고리매니저(CM)는 “오픈마켓에서도 필립스, 브라운, 파나소닉 등 10대 외산 브랜드가 전체 전기면도기 매출의 99%를 차지한다”며 “남성들은 전기면도기를 살 때 브랜드 파워가 있는 좋은 제품을 원하지 가격이 조금 싸다고 구매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조아스전자는 중국 공장에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해 ‘무늬만 한국산’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필립스 등 외국 기업들은 3~4년 주기로 기존 모델과 완전히 다른 신제품으로 ‘프리미엄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현구 롯데하이마트 바이어는 “전기면도기는 기술력이 핵심인 제품이라 오랜 노하우와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며 “연구개발, 마케팅 측면에서 글로벌 대형 업체가 유리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전기면도기뿐 아니라 이·미용기기 시장 전반에서 국내 업체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한 백화점 바이어는 토종 기업들의 상황을 “유통업체의 자체상표(PB) 제품 등으로 대량 유입되는 중국산 저가 제품과 미국·유럽산 프리미엄 제품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 전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