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서울대 기악과 교수가 서울 신촌역 홍익문고 앞에서 ‘달려라 피아노 1호’로 연주하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박종화 서울대 기악과 교수가 서울 신촌역 홍익문고 앞에서 ‘달려라 피아노 1호’로 연주하고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사람들은 그를 ‘영재 피아니스트’라고 불렀다. 네 살 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 치는 천재성을 나타냈다. 또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던 18세 때까지 하루에 8시간 동안 혼자 방에서 피아노만 쳤다. 피아노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는 “화창한 날은 친구들이 놀던 공원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박종화 서울대 기악과 교수(40). 그는 ‘고고한 전당’의 전유물인 피아노를 길거리로 들고 나가기로 결심한 것은 어릴 적부터 내재돼 있던 욕구의 발현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부터 기부받은 피아노를 길거리에 설치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의 기획을 맡고 있다. 지난해 9월 서울 선유도공원에 피아노를 설치, 재능기부 콘서트를 열었다. 올해는 지난 5월 서울 신촌 연세로 차 없는 거리에 1주일 동안 피아노 10대를 뒀다. 거리로 나온 피아노는 행인들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페이스북에 올린 연주 사진은 무려 9만명이 ‘좋아요’를 눌러 화제가 됐다. 박 교수는 “실내 악기란 고정관념을 깨고 거리에서 달리게 하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모아 시작한 것이 도시 재생 프로젝트 ‘달려라 피아노’”라고 설명했다.

피아노와 함께 거리에 선 천재 피아니스트

[人사이드 人터뷰] "피아노 놓으면 거리가 쉼터로 변하죠…'日常 탈출' 준비 됐나요?"
지난 26일 서울 신촌역 홍익문고 앞에서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의 기획을 맡은 박 교수를 만났다. 잦은 비 때문에 실내로 옮긴 피아노를 밖으로 꺼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홍익문고 앞은 ‘달려라 피아노 1호’가 자리 잡은 곳이다.

“피아노를 놓는 순간 채 한 평(3.3㎡)도 안 되는 공간이 도시민의 쉼터로 탈바꿈합니다. 거리에서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거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아노를 배우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겠죠. 또 다른 누군가는 잊고 지내던 피아니스트의 꿈과 추억을 떠올리지 않겠어요.”

‘달려라 피아노’는 집 한쪽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중고 피아노를 시민들로부터 기증받아 운영한다. 예술가와 시민들이 힘을 합쳐 중고 피아노를 새롭게 단장해 ‘작품’으로 만들어 거리공연에 나선다. 공연 뒤에는 지역아동센터에 기부하는 ‘선순환 기부 캠페인’이다. 그는 “생존을 위한 생활공간인 도심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도심에서 느끼는 ‘여행의 순간’

피아노와 피아노의 소리를 도심 곳곳에 심는 게 박 교수의 꿈이다. 피아노를 매개로 일상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쉼과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방향을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평소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 우연한 계기에 ‘지난 3년 동안 무얼 하고 지낸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요.”

박 교수는 거리로 나온 피아노를 통해 도시인에게 ‘여행’을 선물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느냐”며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가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여행과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했다.

“오랜 해외생활로 인한 정체성 위기가 고국으로 이끌어”

[人사이드 人터뷰] "피아노 놓으면 거리가 쉼터로 변하죠…'日常 탈출' 준비 됐나요?"
박 교수는 음악적 천재성 때문에 어릴 적부터 해외를 돌아다녔다. 파격을 꿈꾸는 내면에는 ‘노마드(유목민)’와 같은 그의 삶이 배어 있다. 음악 영재교육을 받기 위해 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능을 알아본 스승은 그를 일본 피아노 음악계의 거장 이구치 아이코에게 데려갔다. 암 투병 중이던 이구치는 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인생의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198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피아노계의 거장 러셀 셔먼을 스승으로 모셨다. 1992년부터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4년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콩쿠르 출전을 금지했던 스승 때문에 1995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콩쿠르에 출전, 최연소 입상과 최우수연주자상을 받았다.

“셔먼 선생님은 제게 가장 큰 음악적 영감을 준 분입니다. 선생님은 커리어를 쌓기 위해 너무 어린 나이에 콩쿠르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경쟁과 순위에 집착해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을 못할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 코모의 마스터클래스, 스페인 소피아왕립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독일 뮌헨음대 최고연주자과정을 거쳐 한때 프랑스에 안착했다. 현대음악의 메카로 불리는 IRCAM스튜디오를 드나들며 드레스덴심포니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심포니, 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번개처럼 나타난 한국의 젊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20대 중반에 잠시 피아노 연주의 의미를 잃고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정작 한국인으로서의 내 뿌리,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무의식’이 발걸음을 고국으로 돌리게 했다.

“물이 모여 강이 되듯 소리가 모여 음악으로 흘러”

2007년 33세에 서울대 기악과 교수에 임용됐다. 오랜 유학생활로 인한 ‘서툰 모국어’ 탓도 있겠지만 감정과 그 감정이 생기는 계기와 과정을 마디마디로 쪼개서 설명하기 위해 그는 유달리 단어를 신중하게 고른다.

강의할 때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대하는 다른 시각과 이를 통해 새로운 연주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역시 화두는 ‘깨달음’이다.

“학생들이 깨달음을 통해 음악에 대한 시각과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 강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교육은 진정한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항상 숙제입니다. ‘음악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강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 교수에겐 아직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언어다. 그는 “한국에서 7년 생활하면서 영어 실력이 많이 녹슬었다”며 “진짜 소통이 가능한 모국어는 결국 음악”이라고 강조했다.

‘음악 감상법’에 대해 물었다. “소리가 모여서 음악이 되고 음악을 경험하면서 교감이 이뤄집니다. 아이들이 물을 처음 만지는 순간을 보세요. 물을 만질 때의 소리, 촉감처럼 피아노도 신기하면 쳐보고 튕겨도 보고, 너무 어렵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음악은 음악일 뿐이에요.”

음악은 다양한 감정처럼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법이 제각기 다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음악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의 두께, 색이 모두 달라요. 음악은 자꾸 듣다 보면 취향이 생깁니다. 그렇게 음악을 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시민들에게 주는 것이 ‘달려라 피아노’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는

英 ‘스트리트 피아노’ 벤치마킹…자원한 7명이 주축

올해 ‘달려라 피아노’ 행사는 서울시와 비영리단체 ‘더 하모니’ 주최로 세종로와 선유도공원에서 다음달 23일부터 10월10일까지 18일간 열린다. 삼익문화재단이 피아노 수리와 조율을 지원한다.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는 2008년 영국 설치미술가 루크 제럼의 ‘스트리트 피아노’를 벤치마킹했다. 제럼은 빨래방에서 문득 아무도 서로 말을 걸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공공장소에 피아노를 갖다 놓으면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이뤄질 것으로 생각했다. ‘Play Me! I’m Your’s!(연주해봐. 난 네 거야)’란 이름을 붙인 피아노를 영국 버밍엄 거리에 놓자 사람들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연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췄다.

‘달려라 피아노’는 자발적으로 모인 기획단과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기획단은 박종화 서울대 기악과 교수, 비영리단체 ‘더하모니’의 문화기획자 정석준 씨를 비롯해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 청소년기획담당 손민정 씨,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소속 작곡·편곡가 채정은 씨, 피아니스트 박선영 씨, 서울시청 공원녹지과 송형남 씨, 외환은행 김보람 씨 등 7명으로 구성됐다.

기획단은 3주에 한 번 만나 회의를 한다. 박 교수는 “기획단 회의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말하지만 우리가 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또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하나가 된다”며 “음악으로 소통하는 기획단의 구조, 관계, 분위기가 ‘달려라 피아노’를 통해 퍼져나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달려라 피아노’ 프로젝트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시민들이 직접 운영하고 홍보한다. 온라인에서 피아노 기부나 꾸미기 재능기부 신청을 받고 있으며, 행사 사진이 SNS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알려졌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