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64)은 시쳇말로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다. 샘표식품 창업주인 고(故) 박규회 회장이 할아버지고,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과 상장회사협의회장을 지낸 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이 아버지다. 박 사장 자신도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학력까지 더했다. 경기고 서울대에 이어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받고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연유로 박 사장에게선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가 연상됐다.

지난 26일 저녁 서울 한남동의 한정식집 비채나에서 만난 박 사장의 모습은 이 같은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글서글한 표정에 밝은 웃음으로 먼저 악수를 청했다. 노타이 차림에 와이셔츠 윗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셔츠 윗단추를 채우겠느냐’고 하니 손을 내저었다. “제 모습이 원래 이래요. 사무실에서도 이렇게 입고 일해요. 음식 맛있게 먹고 편하게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고등학교 때 외우는 게 싫었어요”

박 사장은 “이 집(비채나)은 현대적인 감각의 한식으로 먹는 재미가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외부 손님과 식사할 때 자주 찾는다고 했다.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다. 익숙지 않아 이름을 물어봤다. 도라지두부잡채, 장어깻잎말이찜, 대하옥수수강정, 다시마말이 오징어순대 등이었다. “어서 들어요.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다소 짓궂은 질문으로 시작했다. “사장님이 경기고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셨나요?” 겸손한(?) 답이 돌아왔다. “저는 공부 많이 안 했어요. 학교 수업 빼먹고 충남 대천해수욕장에 놀러가기도 했죠. 외우는 것을 싫어해 국사 같은 과목에서 점수가 잘 안 나왔죠.”

목살고추장찜, 채끝등심과 시래기 된장무침이 나오자 그는 ‘화요’를 주문했다. “한국 음식엔 우리 전통주가 잘 어울리죠.” 술 몇 잔을 비운 박 사장은 학창 시절 얘기를 이어갔다. “예전엔 전자공학이 첨단 학문이어서 인기가 있었어요. 서울대 전자공학과가 서울대 의대보다 들어가기 힘들었죠. 그런데 국사에서 영 자신이 없었어요. 다행스럽게도 시험 문제가 중학교 때 읽은 역사소설에 많이 나온 내용이어서 꽤 괜찮은 점수를 받았죠.”

○“간장회사 사장하길 잘했다 생각한다”

대학 시절엔 음악 활동에 푹 빠졌다고 한다. 4인조 록밴드 ‘레이니 포(Rainy Four)’에서 베이스를 맡았다. 한 방송사가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얘기 주제가 술로 흘렀다. “제 최고 기록은 소주 5병이에요. 술 좀 한다는 선배와 둘이서 안주 없이 소주 10병을 나눠 마셨어요. 일어서니 선배가 대취해서 학교 강의실로 업고 가 잤죠.”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받은 뒤 전공을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철학으로 바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하지만 부친의 권유로 가업을 이어 받기로 결심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자칫 회사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는 경영 환경이 급변하던 때였어요. 대형마트라는 새로운 유통 채널이 생기고 경쟁사에서 신제품을 속속 내놓던 때죠. 이때까지도 회사는 공장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양조장 수준이었어요. 취임하자마자 영업·마케팅 조직을 새로 만들고 품질관리 인력을 늘려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샘표가 만든 장류와 소스가 국내외에서 인정받을 때 교수하는 것보다 간장회사 사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식문화는 아직 멀었다”

17도짜리 화요 두 병이 금세 비워졌다. 이번엔 25도짜리를 주문했다. 한 잔 털어 넣은 그는 “이제야 술맛이 좀 나네”라고 말하며 한국 식문화에 대해 쓴소리를 시작했다.

“우리 식문화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급속한 산업화를 겪는 과정에서 제대로 발전을 못 했어요. 한식집 대부분이 과거 음식을 재현하는 데 그치고 있죠. 음식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비채나처럼 발전된 한식을 선보이는 식당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는 한국 요리사 중 상당수가 여전히 기능공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에선 최고 요리사가 자신의 비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음식의 맛과 문화를 널리 퍼트리는 데 관심이 없죠. 유럽에선 일류 요리사가 자신의 레시피를 책으로 펴냅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런 대목은 배워야 합니다.”

국내 장(醬) 문화도 마찬가지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현재 팔리고 있는 된장은 밀가루를 섞어 만든 ‘싸구려’라 깊은 시골 된장의 맛을 못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음식 세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다”

접시가 바닥을 드러낼 때쯤 식사를 주문했다. 박 사장은 “민어는 아직도 제철이지?”라고 점원에게 묻고는 ‘민어 맑은탕’을 시켰다. 주문을 마친 그는 한때 삶에 회의를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 회사를 맡았을 때는 ‘돈 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내가 간장 장사 하겠다고 모든 것을 포기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민 끝에 ‘역시 사람은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느낄 때 행복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철학 공부 한 것이 도움이 된 것인가요?”

그가 추진하는 ‘장류의 세계화’는 이 같은 고민의 결과다. “간장, 고추장, 된장 등 7개 한국 대표 소스를 유럽 음식에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음식을 대상으로 150개 요리법을 새롭게 만들었어요. 한국의 장류를 ‘매직 소스’로 부르면서 관심을 보이는 요리사가 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큰 돈 벌 생각 안 하고 세계에 한국 음식문화를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꾸준함이 무엇보다 중요”

후식은 쌀두유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이스크림 안에 쌀과 콩의 고소한 맛이 녹아 있어 입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막바지 대화 주제는 ‘요즘 직원들한테 가장 강조하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어떤 음식이든 맛있을 때까지 먹어볼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함경도 집안이라 어렸을 때 집에서 함경도 음식만 먹어서 청국장과 홍어는 결혼하고 처음 먹어봤어요. 그 참을 수 없는 냄새와 맛이란…. 그래도 많은 사람이 즐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 꾹 참고 꾸준히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 이래서 맛있다고 하는구나’라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맛을 느끼는 것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고 지식인 것 같아요. 음악이나 미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사업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샘표식품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식당인 ‘미스터 김치’를 열었다가 적자 누적으로 문을 닫는 등 많은 실패를 겪었어요. 하지만 꾸준히 도전하다 보면 인정받고 성공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 환갑 맞은 ‘샘표’…국내 最古 상표

샘표식품은 1946년 설립돼 올해로 창립 68주년을 맞았다. 함경도에서 서울로 온 고(故) 박규회 회장이 1946년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그만 소스공장을 인수한 것이 모태다. 샘표식품은 1954년 ‘샘표’ 상표를 등록했다. 등록번호가 362번인 샘표는 올해로 등록 60주년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상표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철학박사가 무슨 간장 장사?"
■ 박진선 사장의 단골집 비채나
장어깻잎말이찜·대하옥수수강정…계절마다 색다른 한식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철학박사가 무슨 간장 장사?"
비채나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활용해 색다른 한식을 선보이는 한정식 전문점이다. 도자기 전문업체인 ‘광주요’ 조태권 회장의 둘째 딸인 조희경 씨가 운영하고 있다. 비채나는 ‘비우고, 채우고, 나눈다’는 의미로 한 계절 동안 담아낸 것을 비우고, 계절이 변화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채우고, 그 계절 정성이 담긴 음식을 나눈다는 뜻을 담았다.

계절마다 7개 정도의 대표 메뉴를 비롯해 채소, 생선, 육류, 탕과 찌개 등 기본적인 한식의 범위 안에서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인다. 단품 요리는 2만~6만8000원이다. 세트 메뉴는 점심용인 ‘비채나 오찬세트’가 4만5000원이고, 저녁 세트는 6만5000원, 9만6000원, 14만3000원 등 다양한 가격대로 이뤄져 있다. 모든 식재료는 국내산을 쓰고 있다.

메뉴로는 흑돼지 등갈비구이, 장어깻잎말이찜, 보리고추장으로 양념한 대하옥수수강정이 대표적이다. 장어깻잎말이찜은 숯불에 구운 장어, 더덕, 깻잎 장아찌를 전병으로 말아 찐 뒤 초간장에 버무린 생강, 양파, 깻잎을 곁들여 낸다. 광주요에서 만든 전통 증류주 ‘화요’도 맛볼 수 있다.

점심에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운영하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오후 5시30분부터 10시까지 영업한다. (02)749-6795~6

■ 박진선 사장

▷1950년 서울 출생 ▷1973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9년 스탠퍼드대 전자공학석사 ▷1988년 오하이오주립대 철학 박사 ▷1997년 샘표식품 대표이사 ▷2008년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2011년 국제한식문화재단 이사

이현동/임현우 기자 gr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