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의료기기업체 대표, 규제와 싸운 '고통의 10년'
39년 동안 멸균기(세균을 소독하는 의료기기)를 생산해온 중소기업 대표가 규제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보낸 탄원서를 엮은 자료집을 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식약처에 ‘불합리한 규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한 민원서와 ‘규정 때문에 안 된다’는 식약처 답변서를 모은 것이다. 11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집이다. 제목은 ‘고통의 10년’이다.

김정열 사장
김정열 사장
김정열 한신메디칼 사장(64)은 “지난 10년 동안 법적·제도적 문제점에 대해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해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며 “식약처가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지 않아 입은 손해가 수십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국기관 시험 성적서 인정 안돼

한신메디칼은 1975년 한일의과공업 소독기사업부를 모태로 설립된 멸균기 생산 전문기업이다. 2010년 ‘500만달러 수출의 탑’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핵심의료기기 제품화 사업체’로 선정됐다.

이 회사를 운영해온 김 사장에게 ‘규제의 벽’은 너무 높고 단단했다. 유럽에 제품을 주로 수출하는 이 회사는 2000년 신제품 품목 허가를 받기 위해 독일 최대 시험검사기관인 TUV에서 받은 유럽인증(CE)과 시험검사 성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식약처는 ‘외국 기관 성적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품목허가를 반려했다. 그러면서 ‘식약처에서 지정한 국내 시험검사기관에서 다시 시험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 사장은 “외국에서 받은 시험검사 성적서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같은 시험을 국내에서 또 받으라고 했다”며 “국내에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품목당 수천만원에 이르는 추가 시험비용을 부담해야 했다”고 말했다.

○“새 기준 받아들이지 않아”

김 사장은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제도를 운용해줄 것을 식약처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한신메디칼은 2005년 의료기기의 전기·기계 분야 국제규격인 ‘IEC60601’이 개정되자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개정된 IEC60601은 ‘의료기기의 설계 단계부터 제품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기술문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인증을 받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게는 10배가량 들어간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유럽에서는 관련 기준이 2012년부터 적용돼 한신메디칼은 서둘러 준비했다.

이후 국내에서도 신제품 허가를 받기 위해 개정된 IEC60601 기준으로 받은 시험성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식약처는 새로운 기준의 시험성적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관련 제도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김 사장은 “국제적으로 더 이상 통용이 안 되는 예전 기준으로 시험을 또 받으라는 답이었다”며 “불필요한 시험을 요구한 식약처에 집단소송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고 토로했다.

○식약처 “국내 환경 고려해야"

식약처는 지난해 5월에 가서야 관련 고시인 ‘의료기기 전기·기계적 안전에 관한 공통기준규격’을 개정했다. 내년부터 고위험 의료기기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새로운 기준을 적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외국 시험기관의 인증은 여전히 제한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외에서 검사를 통과한 의료기기도 국내 환경에 적합한지 안전성을 따져야 한다”며 “외국 시험기관의 인증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 국내 기술장벽이 무너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업계는 “국내외 인증기관이 검사하는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중복 인증에 따른 비용과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라며 “국내 의료기기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국내 시험검사기관들의 배만 채워주는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김 사장은 “의료기기 규제와 허가를 담당하는 식약처에 계속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이번 자료집 발간을 계기로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의료기기 제조업 육성에 도움이 되는 행정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