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로 꽃 피운 '몽유도원도'
겹겹의 여러 준봉이 안개와 구름에 휩싸여 몽롱하고 환상적인 화면을 드러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실루엣이 언뜻언뜻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과 유리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숲이나 나무보다는 자연의 정신을 그려 현대인의 다양한 생각까지 녹여냈기 때문이다. 문인화 전통의 사의적(寫意的) 산수를 현대 화풍으로 계승한 석철주 화백(64·추계예술대 동양화과 교수)의 작품 ‘신몽유도원도’다.

석 화백이 청전 이상범 화백을 만난 지 40년 되던 2005년부터 10년째 그려온 ‘신몽유도원도’ 시리즈 대작 30여점을 내보인다. ‘몽(夢) 그리고 몽’을 주제로 내달 9일까지 경기 남양주 서호미술관에서 여는 개인전을 통해서다.

석 화백이 16세에 부친의 권유로 청전 문하에 들어가 전통산수화를 익힌 지 올해로 벌써 48년이 흘렀다. 청전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20세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첫 입선하고 이후에도 크고 작은 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준봉이나 희뿌연 구름, 안개에 휩싸인 풍경을 먹이 아니라 아크릴로 그려 동양의 전통 산수화 개념에 어떻게 현대적 해석을 더하고 풀어갈지 고민했다”며 “누구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흉중구학(胸中邱壑·가슴속의 언덕과 골짜기)’을 그려 감동을 응축해 내는 게 자신의 그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초록 물결이 산과 강을 휘감은 여름 산수, 눈이 내리는 겨울 산수 등 안평대군이 꿈꿨던 이상향을 현대적 기법으로 그려낸 것들이다. 신작은 모기장 같은 모눈을 더해 구상성을 좀 더 강화했고, 색도 다양해졌다. 디지털시대를 상징하는 픽셀 개념을 응용한 새로운 실험이다.

“안견의 정신까지 디지털 시대에 맞게 담아보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화법이나 색감, 내용 등에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고요.”

석 화백은 흰색이나 검은색의 바탕색을 칠한 뒤 그 위에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을 덧칠한다. 이 덧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맹물에 적신 붓으로 대상을 그리고 그리기가 끝나면 재빨리 마른 붓으로 여러 번 붓질하는 과정을 거친다. 억지로 쌓아 만드는 형상이 아니라 저절로 우러나오는 풍광이다. 이른바 ‘맹물 붓질’의 미학이다.

“맹물 붓질은 제가 의도한 것이지만 붓질의 스며듦으로 인해 화면에는 우연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서양화의 ‘덧칠’과 한국화의 ‘스밈’ ‘여백’을 조화롭게 혼용한 것이다. 서양화 재료인 아크릴로 덧칠을 하고 맹물 붓질로 한국화의 ‘일획성’을 견지함으로써 된장처럼 안에서 우러나오는 은은한 맛을 던져준다. (031)592-1864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