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찬규 학고재 회장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입구에서 앞으로의 운영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우찬규 학고재 회장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입구에서 앞으로의 운영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따르릉….”

지난해 6월 우찬규 학고재 회장(57)에게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진양핑 중국 항저우미술학원 교수(화가)였다. 진 교수는 상하이 예술특구인 모간산루(莫干山路) 요지 M50에 갤러리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서울 부암동에 새 미술관을 세우려던 우 회장은 이 소식을 듣고 방향을 틀었다. ‘미술 시장은 경제 중심지를 따라가게 돼 있다’고 본 그는 평소 중국 상하이가 미술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6개월여 만인 12월20일 상하이 학고재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현재 상하이에 있는 480여개 갤러리 중 유일한 한국 상업화랑이다.

상하이 학고재갤러리
상하이 학고재갤러리
한학에 조예가 깊은 우 회장에게는 중국의 작가나 교수 등 친구가 많다. 이들은 우 회장이 25년 동안 학고재갤러리를 경영해온 노하우를 가진 데다 중국 문화 전반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상하이 진출 결정에는 그만의 독특한 경영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우남 최준석 선생에게 주역을 배운 그는 세상사의 요체가 주역의 원리에 있다고 본다.

“주역은 우주만물의 생장소멸 이치를 음과 양으로 압축해 설명합니다. 양이 번성하면 음이 귀해지고 음이 성하면 양이 귀해진다는 일종의 역발상이죠.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주나라 때의 거부인 백규가 축재 비결로 ‘자신은 남이 버리면 취하고 남이 취하면 준다(人棄我取 人取我與)’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도 주역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그가 1988년 학고재갤러리를 열었을 때 사업 방향도 주역의 원리에 바탕을 뒀다. “당시 국내 화랑은 전부 서양미술 쪽으로만 몰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한국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죠. 결과는 대성공이었고요.”

그는 출판사를 함께 운영해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 상업을 추구하는 화랑의 이미지를 출판사의 ‘진지한’ 이미지와 결합했다. 이 역시 음양의 조화다. 중국인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데도 출판 사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돈을 덜 추구한다는 이미지로 비친 거 같아요. 옛것을 배워 새로움을 창조한다(학고창신·學古創新)는 뜻을 지닌 학고재의 상호도 호감을 줬고요.”

앞으로 상하이 학고재갤러리에선 한국과 서양 작가의 전시를, 한국에선 중국 작가전을 연다는 게 그의 계획이다. “중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외국 미술의 자국 내 소개입니다. 오랜 노하우를 지닌 외국 화랑이 들어와 주길 바라는 거죠. 모두 주역의 이치에 부합합니다.”

그는 화랑가에서 남다른 신인 발굴 안목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학고재갤러리 전속 작가인 윤석남은 그 단적인 예다.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인 제시카 모건이 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윤석남을 꼽은 점만 봐도 그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 회장이 작가를 고르는 기준은 ‘이 작가가 미술사에 남을 작가인가 아닌가’다. “미술의 역사를 장식한 인물을 보면 하나같이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작가들”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오윤, 신학철, 강요배, 이종구, 이철수 등 민중계열 작가는 그런 안목으로 발견해 낸 작가들이다.

그는 1주일에 2~3일을 중국에서 보낸다. 상하이는 물론 베이징, 청두 등 미술과 역사의 중심지를 누빈다. 작가나 화랑 관계자와 술잔을 부딪치며 친분을 쌓고 중국 문화의 이해를 넓히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우선은 상하이 학고재가 출발 단계인 만큼 그쪽 사업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지난해 출판사도 주식회사로 전환해 다른 분께 경영을 맡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중국 미술의 본고장인 항저우, 베이징 등에 우리 작가들을 알리는 게 급선무입니다.”

상하이 학고재가 내달 말 항저우에서 ‘한국현대미술: 우리가 경탄하는 순간들’ 전을 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백남준, 이우환, 김아타, 이용백 등 한국의 대표 작가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주역 경영의 핵심은 음과 양, 위와 아래, 좌와 우의 균형을 먼저 생각하는 데 있다. 부족과 결핍, 갈망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은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돈을 따르지 않고 돈이 따라오게 하는 우 회장의 행보를 기대하는 이유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