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수의 그 남자…변속기의 모든 것
연애를 잘하는 사람을 ‘연애 9단’이라고 부릅니다. 돈에 밝아 재산을 잘 불리는 이는 ‘재테크 9단’이라고 하죠. 그리고 정치 9단, 야구 9단이라는 말도 있죠. 일반적으로 ‘9단’은 그 분야의 최고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뜻합니다.

자동차에도 ‘단’이라는 말이 쓰입니다. 변속기에 단을 붙이죠. ‘수동 6단’ ‘자동 9단’ 이렇게 말이죠. 정치 9단, 연애 9단의 ‘단’과 마찬가지로 변속기의 단도 ‘층계 단(段)’을 씁니다. 변속기는 자동차의 주행성능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운전할 때 기어를 조작하지만 변속기 단수가 높을수록 왜 좋은지, 연비 향상에 왜 도움을 주는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트럭 가운데선 무려 16단 변속기를 장착한 모델이 있다는 것도 말이죠.

변속기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기 위해 카앤조이가 직접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공부했습니다. 자동차 주행과 연비를 좌지우지하는 고단 변속기, 그 치밀하고도 매력적인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변속기 단수는 속도 조절 ‘계단’

현대차 8단 자동변속기
현대차 8단 자동변속기
자동변속기는 크게 토크 컨버터와 기어박스로 나뉩니다. 엔진에서 발생한 동력이 토크 컨버터를 거쳐 기어박스로 전달됩니다. 토크 컨버터는 동력을 전달하고 동시에 기어의 자동 변속을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수동변속기에는 이 부품이 없습니다.

기어박스 내부는 크게 △솔레노이드 밸브 △클러치·브레이크 △기어(톱니바퀴)로 구성돼 있습니다. 동력을 전달받은 솔레노이드 밸브가 유압(오일 압력)으로 기어의 움직임을 조종합니다.

현대차 6단 수동변속기
현대차 6단 수동변속기
변속기 단수에 따라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있고 1, 2, 3 등 단수별로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기어박스의 클러치·브레이크가 개별 톱니바퀴를 작동, 정지시키는 역할을 하죠. 기어박스를 통해 조절된 동력은 휠을 빠르게 또는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것이 변속기가 맡은 역할이죠.

기어단수에 비례해 톱니바퀴의 수도 늘어납니다. 흔히 ‘단수가 높을수록 좋다’고 얘기합니다. 일정한 높이를 6개(6단) 혹은 8개(8단)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걸 생각해 보시죠.

계단 수가 늘어날수록 개별 계단 높이가 낮아지기 때문에 보다 쉽고 빠르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변속기가 다단화될수록 가속이 빠르고 연비가 좋다’고 말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단수를 무작정 늘릴 수는 없습니다. 다단화될수록 톱니바퀴 수가 늘어나고, 변속기 무게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기어 단수를 늘려 연비가 향상된다 해도 차체 무게 증가로 인한 손실이 더 크다면 무의미합니다.
고단수의 그 남자…변속기의 모든 것
수동, 자동, 무단, 듀얼클러치…

변속기 종류는 꽤나 많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수동(MT)부터 자동(AT), 무단(CVT), 수동기반자동(AMT), 듀얼클러치(DCT)까지 다양하죠. 각각 특성과 장단점이 있습니다. 수동은 운전자가 직접 기어 단수를 조작합니다. 운전자가 변속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차는 힘을 덜 들이죠. 그래서 수동 차량이 자동보다 연비가 좋은 겁니다.

자동은 말 그대로 자동차가 알아서 속도에 맞게 변속을 해줍니다. 차량이 판단하고 변속도 하니 힘(연료)이 더 들어가죠. 수동기반 자동변속기는 수동의 높은 연비와 자동의 편의성을 한데 모았습니다. 기계적인 구조는 수동이지만 이를 자동으로 변속해주는 기능을 추가한 것입니다.

연비 향상 효과가 우수하지만 변속 시 진동이 크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현재 푸조, 시트로앵 등 일부 자동차 회사와 대부분의 상용차 제조사에서 이 변속기를 사용합니다.

볼보 트럭 수동기반 자동변속기
볼보 트럭 수동기반 자동변속기
듀얼클러치는 수동기반 자동변속기를 한 단계 더 개선한 겁니다. 보다 효율적이고 빠른 가속을 할 수 있도록 변속을 담당하는 클러치를 한 개 더 추가한 제품입니다. 클러치가 두 개라 ‘듀얼 클러치’죠. 가속성능이 좋고 연비 향상효과도 있어 최근 자동차 제조사들이 널리 쓰는 제품입니다. 포르쉐 PDK, 메르세데스 벤츠 G-Tronic, 폭스바겐 DSG 등이 대표적인 듀얼클러치입니다. 현대차도 DCT를 독자 개발해 준중형 벨로스터에 탑재한 바 있습니다. 쏘나타와 아반떼 등 다른 차종으로 확대할 예정입니다.

무단변속기는 말 그대로 단계적인 기어 변속 없이 속도를 올리고 내리는 제품입니다. 기어 변속하느라 힘을 들이지 않아 연비향상 효과가 우수합니다. 세계적인 일본 변속기 제조사 자트코가 이 부문에서 독보적입니다.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업체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죠. 하지만 가속할 때 소음이 거슬리고, 고속 주행 때 엔진 출력을 온전하게 바퀴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다단화 선두주자 독일 ZF…16단 첫 상용화

변속기는 적용 차량에 따라 크게 승용차와 상용차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크기입니다. 덩치 크고 출력이 400~500마력을 넘나드는 상용차는 대형 변속기가 필요하죠. 연비 향상을 위해 다단화도 더 많이 진행됐습니다.

9단 자동변속기
9단 자동변속기
변속기 다단화의 선두주자는 내년이면 창립 100년을 맞는 독일의 변속기 전문 부품사 ZF입니다. 이 회사는 현재 미국 공장에서 9단 자동변속기(사진)를 생산해 랜드로버와 크라이슬러 등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상용차 부문에서도 16단 변속기를 가장 먼저 상용화했죠. 최근 효율성과 적용 범위를 넓힌 새 변속기 ‘트락숀’을 개발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경쟁자는 많습니다. 폭스바겐은 이달 초 8세대 신형 파사트를 공개하며 10단 듀얼클러치 변속기를 개발해 탑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상용차 부문에서는 볼보가 ZF와 치열하게 기술 경쟁 중이죠. 벤츠 역시 트럭과 승용 모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변속기 제조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8단 자동변속기를 자체 개발해 상용화한 현대자동차도 10단 제품을 개발 중이라고 하니 기대됩니다.

아헨(독일)=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