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초라한 '2·17 합의서'를 들고…
은행업은 복잡한 테크닉에 의존하지 않는다. 면허대로 착실하게 영업하는 것이 전통이다. 함부로 빌려주지 않고 떼이지 않으면 돈을 벌게 돼 있는 시간장사가 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선진금융기법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월가의 고도화된 금융 엔지니어링과 혼동됐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 당국이나 소위 전문가, 언론들조차 입만 열면 선진금융을 운운했었지 않나.

그것으로부터 많은 착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일은행이 뉴브리지를 거쳐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으로 팔려갔고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팔려간 것도 선진금융기법 콤플렉스의 결과였다. 외환위기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내밀한 영업 노하우가 있는 것처럼 오해됐다. 그래서 은행법 위반, 주가 조작 등 많은 무리수들은 쉽게 무시됐다. 물론 아직 조사조차 해본 적이 없는 국제적 커넥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위에 노무현 정부는 어느 날 “서울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그때의 당혹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대통령 본인의 기발한 조어만큼이나 괴이쩍었다.

자본시장 통합법을 제정하면서도 그토록 강조됐던 단어는 투자금융업 육성이었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육성하겠다는 공염불도 서울 금융허브처럼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투자금융을 육성한다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열정은 증권산업이 빈사상태에 이른 지금에 와서야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투자금융이라는 말은 실은 상호신용금고를 저축은행이라고 부르면서 상업은행과 착각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과장되고 어색한 단어다. 그냥 증권회사면 족하다. 그렇게 한국 금융업은 십수년을 허송세월했다.

선진기법 따위의 주술적 언어는 이제 사라졌다. 투자금융업의 실력이라는 것이 위험을 떠안는 자산의 크기와, 상품을 속여서라도 소화해내는 네트워크 효과의 조합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됐다. 어떻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은행들이 팔려 나갔다. SC은행은 제일은행의 이름조차 지워버렸다. 조·상·제·한·서의 서열은 무너졌지만 SC은행이 저축은행 수준으로까지 전락한다며 안타까워하는 OB들이 많다. 이들은 아직도 억울해 한다.

외환은행은 더욱 안타깝다. 전문 뱅커라는 직원들의 자부심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지난 10년간 신한은행 자산이 227조원으로 3배, 우리은행이 230조원으로 2.5배, 하나은행이 155조원으로 2배의 증가세를 보이는 동안 외환은행은 2009년 100조원을 넘어선 자산 규모를 수년째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SC는 70조원, 씨티는 56조원의 역시 빈약한 횡보를 보이고 있다. 사실 정치적 오염만 아니라면 은행이 부실해질 수 없다.

지난 주말 외환은행 직원들은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가졌다. 론스타에 팔려가 그토록 고혈을 빨린 뒤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2012년의 ‘2·17 합의’라는 초라한 문서 한 장이 전부다. 이 초라한 합의서를 흔들며 길거리에 모여 침몰해가는 은행을 내버려두라는 자해적 절규를 외칠 만큼 자존심도 명예도 사라진, 그저 연봉만 억대인 피합병 근로자들이 되고 말았다. 비록 저금리 시대이기는 하지만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모든 수치가 더욱 낮은 단계로 가라앉고 있을 뿐이다.

2·17 합의라는 것도 돌아보면 실로 은행답지 않은 정치적 합의였다. 당시 김석동 위원장까지 달려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합의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어떤 수치를 보더라도 하나·외환 합병 반대론은 이대로 살다 죽겠다는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지난주 초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2017년까지는 합병하지 않는다는) “노사합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국회에서 증언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 중에는 외환은행 임직원들로부터 정치헌금을 받는 의원도 있었을 것이다. 위원장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하냐 말이다. 외환은행은 그런 얄팍한 정치 위에서 떠다니고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