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1)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현대 국가는 세입과 세출을 일치시키는 재정균형을 목표로 하지만 조선왕조는 수입을 가능하면 많이 남겨 비축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을 저장해 전쟁과 기근에 대비하였는데, 평상시에도 봄마다 민간에 대여한 후에 가을에 이자를 더하여 환수하였다. 다름 아닌 환곡(還穀)제도다. 대략 30%는 창고에 남겨두고 70%를 민간에 대여하였으며 10%의 이자를 수취하였다. 본래는 이자 수입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곡물을 오래 저장하면 변질되고 쥐가 먹거나 하여 축이 나기 때문이었다.

조선전기에는 태종 후반기부터 저장한 곡물의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세종대부터 세조 전반기까지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매년 대부하고 환수할 수 있는 의창(義倉)의 곡물이 100만석이 넘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270만여석이 분배됐다. 세조 후반기부터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해 임진왜란으로 바닥에 이르렀지만 17세기 후반인 숙종 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는 500만석,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감소하였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800만 석 수준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환곡의 관리가 부실하게 되어 장부상으로만 기록된 곡물이 늘어나 1862년에 전체 환곡의 54.4%나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환곡의 정상적인 운영은 중단되었으며 조세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환곡 1000만석은 쌀로 환산하면 600만석 정도가 되는데, 중앙과 지방을 합한 1년 세입이 400만석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는 국가재정보다 더 큰 규모의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시기 1790년대의 중국의 경우에 상평창(常平倉), 의창, 사창(社倉)에 저장한 곡물이 쌀로 환산하여 2300만석이었다. 곡물의 총량은 중국이 더 컸지만 중국의 인구가 3억인 것에 비하여 당시 우리나라는 1600만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1인당으로 계산하면 중국의 5배나 되었다. 국가가 저장한 곡물량으로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이 틀림없다.

1인당 곡물 저장량은 중국보다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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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이렇게 막대한 양의 곡물을 저장한 가장 큰 이유는 기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기근(famine)은 ‘식량소비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의해 광범위한 사망을 야기하는 기아(starvation)의 특별히 치명적인 징후’로 정의된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으로 영양상태가 악화되는 것만으로는 기근이라고 하지 않고 비교적 단기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사태를 기근이라고 하는 것이다. 1994년 이후 5년 정도의 기간에 수십만에서 200~300만의 아사자가 발생한 북한을 생각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길가에 굶어 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다”거나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찼다”는 기사는 찾기 어렵지 않고, 임진왜란 때는 특히 심하여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할 정도였다.

숫자가 나타나는 것은 현종 12년(1671)으로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국에 거의 100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숙종 21년과 22년(1695~1696)의 기근도 심각하여 호구의 숫자가 격감하였다. 1693년에 154만7000여호(戶), 704만5000여구(口)였는데, 1696년에 120만여호, 520만여구로 줄어들어 3년 사이에 34만7000여호, 183만6000여구가 감소하였다. 영조 7년과 8년(1731~1732)의 기근도 심각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환곡이 급속히 증가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러한 기근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곡물을 비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기근은 대략 17세기 중 후반에 정점에 이른 후 장기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여주지만 정조대인 1780~1800년에 기근의 빈도가 다시 높아졌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순조 9년과 10년(1809~1810), 순조 32년과 33년(1832~1833), 고종 13년(1876)에 큰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1832~1833년의 기근은 국왕이 백성의 20~30%가 줄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환곡제도를 통해 곡물 수급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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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 가뭄이나 홍수, 냉해와 같은 이상기후나 병충해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량의 변동이 크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특히 곡물은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재로서 가격이 변해도 수요의 변화가 작다는 의미에서 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매우 작다(수요곡선의 기울기가 매우 가파르다). 이로 인해 공급이 조금만 변해도 가격이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곡물의 생산량과 가격의 변동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곡물을 가격이 높은 곳으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이동시켜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우선 곡물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면, 어느 지역의 흉작으로 가격이 상승하면 가격 차이를 노리고 이익을 얻기 위하여 가격이 싼 지역의 곡물이 비싼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왕조는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환곡제도를 통해 국가가 저장한 곡물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을 택하였다.

곡물시장의 발달이 미약하였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지만, 시장에만 맡겨둘 경우 기근이 해결될지가 불확실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기근 지역의 곡물 가격이 상승하여 곡물이 유입된다고 해도 곡물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곡물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에는 추가적인 가격상승을 기대해 곡물이 시장에서 퇴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왕조는 각지에 창고를 만들어 곡물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기근이 발생한 지역으로 이송함으로써 기근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국가에 의한 지역 간 곡물 이동은 영조대(1724~1776)에 가장 활발하였다. 1만석 이상만 집계하여도 총 64만석이 기근 구제를 위해 도(道) 경계를 넘어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에서 함경도와 전라도로 이동하는 양이 가장 많았지만, 거꾸로 함경도에서 경상도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농민의 국가 의존 높아져

이러한 국가에 의한 기근 구제로 인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많았고 사회 불안을 방지할 수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된 것에는 백성들이 생존 위기에 최종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이 국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농민의 의존은 민간에 의한 저축이나 지역 차원의 구제 제도가 발달할 유인을 약화시켰다.

이단하(李端夏)는 숙종 10년(1678)의 상소에서 과거에는 부호들이 사채로 빌려주는 곡물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수십년 이래로 지방관이 부호의 곡물을 강제로 빼앗아 기민(饑民·굶주린 사람)에게 나눠 주고 부호들이 돌려받으려고 하면 처벌하였기 때문에 부호들이 곡물을 늘리려고 하지 않아서 농민과 민간의 축적이 모두 탕진되고 오로지 국가의 곡식에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21)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또한 조선왕조는 아사자를 구하기 위해서 비상시에만 곡물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었으며 평상시에도 매년 농민들에게 생산요소인 종자(씨앗)와 식량을 지급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모두 소비하고 봄에 국가가 주는 환곡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극단적인 예이겠지만 세종 30년(1448)에 스스로 종자를 준비한 자를 조사하였더니 양주군의 경우 노씨와 오씨 두 사람 60석에 불과하였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