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不義한 세금으로서의 상속세
불평등은 언제나 기득권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불평등에 세금을 매기자는 주장도 새로운 제안은 아니다. 국가는 종종 모든 종류의 약탈을 세법(稅法)이라는 이름으로 합법화해준다. 민주주의에서는 욕망에 정의라는 포장지를 씌울 수도 있다. 최근의 유행어인 ‘토마 피케티’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다. 이론에서 패배하더라도 정치 선동만큼은 피케티의 이름으로 살아남는다. 그래서 억측과 비약의 급격한 증세안을 내놓은 것이다.

소득의 80% 이상을 세금으로 빼앗자는 피케티의 주장에 놀랐다면 순진하다. 존 F 케네디가 정권을 잡았던 1961년 당시 미국의 소득세 최고세율은 이미 91%였다. 그러나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를 포함한 당대 부자들은 이 약탈적인 세금을 내본 적이 거의 없다. 조세피난처 같은 곳들은 케네디 일가의 재산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의외로 잘 지켜준다. 케네디가 21%포인트의 파격적 감세를 들고나온 것에는 절세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70%로 내려선 미국 소득세의 최고 한계세율은 레이건 정부 들어서야 50% 아래로 떨어졌다. 생각해보라. 벌어들인 것의 90%를 국가가 가져가는 것을 약탈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약탈이라고 부를 것인가.

토지 단일세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토지국유화를 요구했던 헨리 조지는 토지에서 창출되는 부(富)야말로 불평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와 빈곤’은 전염성은 강한 구호였지만 조지 자신은 몇 번인가의 선거에서 떨어졌다. 토지의 가치를 단순히 위치에 의해 결정되거나 인구 증가에 의해 결정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불평등은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도 호흡이 긴 선택의 결과다. 부에 대한 정의론자들의 공세는 그 때문에 언제나 빗나간다. 그들은 개인 각자의 치열한 기업가적 선택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자산을 투입하면 저절로 일정한 아웃풋이 나온다고 등식화한다. 허 참! 개발업자들이 웃을 일이다.

굳이 조지나 피케티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물려받은 것이 좀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을 갖는다면 이미 중년이다. 자신의 노력 아닌 운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상속세를 왕창 매기는 허망한 앙갚음은 생각하지 마시길 바란다.

존 롤스는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을 시정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우연의 결과 아닌 대체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부지런한 성품이야말로 우리의 목소리처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는 롤스도 인정하는 절망적 상황이다. 두뇌와 미모는 또 어떠한가. 압구정동 성형외과에서 자신의 얼굴 견적을 협상하고 있는 다급한 여인에게 미모는 절대 양보 불가능한 우연이다. 왜 우리는 이 비극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보호하지 않는가.

자식에게 올인한 A와 조그만 공장에 올인한 B를 생각해보라. A의 자식은 상속세가 제로지만 B의 자식은 공장의 절반을 잘라 팔아야 한다. 대기업이라면 65%를 팔아야 한다. 정의롭다는 상속세는 실은 이렇게 불의(不義)하다. 쓰리쎄븐과 농우바이오 등은 그렇게 기업을 팔아, 소위 정의롭다는 세금을 바쳤다. 물론 시장에는 하이에나 같은 투자자가 있어서 눈물 속에 팔려나오는 그런 기업만 골라 인수한다. 그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워런 버핏이다.

상속세는 평생의 부지런함을 징벌한다. 저축과 근검절약을 약탈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예외적 감면을 만들 것이 아니라 상속세를 아예 전면 폐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상속세를 아무리 높여도 총세수 비중은 1% 남짓이다. OECD 0.31%, 한국이 1.18%, 독일이 0.44%다. 스웨덴 등 수많은 나라에서 상속세를 아예 폐지해버린 것은 그 때문이다. 정의롭고도 논리적인 국민들이다. 인간은 축적한다. 그게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니 인간성을 질투하지 말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