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전선', 탄탄한 극본·개성 캐릭터…이게 진짜 연극
서울 대학로 소극장 시월에서 공연 중인 연극 ‘만주 전선’(사진)을 보면서 얼마 전 한 배우가 손으로 물결을 그리며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박근형 극단 골목길 대표와 10년 이상 한솥밥을 먹은 배우다.

“연출님은 흐름을 타요. 가장 높이 올라간 지점에선 천재로 변하고 그럴 때마다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밑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은 (박 연출가 작품을) 싫어하고 욕하기도 하지만요. 하하하.”

이 배우의 인물 분석을 그대로 따르면 박 대표는 요즘 ‘흐름의 정점’에 있는 듯하다. ‘만주 전선’의 배경은 1942년 만주국 수도 신경(현 창춘)에 사는 조선인 의사 기무라의 살림집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스카의 축하 파티를 위해 친구들이 모여든다. 시인 가네다와 기무라 약혼녀 나오미, 아스카 동생 게이코, 아스카가 연모하는 일본 무역회사 직원 요시에 등이 ‘만주족 조선인의 별’이 된 아스카와 함께 술잔을 들고 그들의 꿈을 얘기한다.

얼핏 보면 ‘대동아공영 찬양, 친일 미화’ 연극 같다. 그들은 조선어 이름으로 불리는 걸 수치로 여기고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한다. 찬송가와 유행가를 일본어로 부르고,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를 ‘비적’이라 욕한다. 마지막엔 욱일승천기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웃음을 유발하는 대사와 극적 설정 속에 드러나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허위의식과 속물근성, 우리 시대를 향해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풍자와 조롱, 비꼼을 알아채지 못할 관객은 없다. “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는 우리에게 먼지 낀 곰팡이가 되어 돌아온다. 그들이 꿈꾸는 이상향 만주국이 오늘 이 시대에도 계속 펼쳐지는 것이 정말 연극적”이라는 박 대표의 ‘연출의 글’이 가슴을 파고든다.

극중 성극을 만들 때 마지막까지 내용을 바꾸고, “연기는 경험에서 우러난다”고 외치는 아스카의 모습에서 극단 골목길과 박 대표의 제작 관행과 연극관이 비치는 것도 재미있다. 탄탄한 드라마와 밀도 높은 구성이 주는 연극적 재미가 쏠쏠하다. 등장인물 캐릭터 하나하나에 개성이 살아있다. 이들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생동감과 긴장감이 시종일관 극에 집중하게 한다. ‘올해의 연극’으로 꼽힐 만한 수작이다. 강지은 정세라 권혁 이봉련 김은우 김동원 등 출연. 오는 29일까지, 3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