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과학기술이 부끄럽다
1995년 일본에서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 사건이 터졌을 때다. 이 소식이 미국에 날아들자 당시 미국 신문은 워싱턴으로 향하는 메트로 출근길에서 오간 대화를 이렇게 전했다. “여기서 저런 사건이 터지면 어쩌지?” 한쪽에서 백인들끼리 수군댄다. 곧 다른 쪽에 앉아 있던 흑인이 이들을 안심시킨다. “걱정 마시오. 우리에겐 NIH(국립보건원)가 있잖소. 이미 그런 경우를 대비해 뭔가 준비해 두었을 것이오.”

“우리는 NIH가 있잖아”

미국의 연구개발(R&D) 예산은 덩치 큰 나라치고는 너무 간단하다. 예산의 반은 국방에 할당한다. 그리고 나머지의 절반은 NIH 몫이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임무는 확실히 한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이래서 일반 국민도 위기 시에는 국가가 나설 것이란 믿음이 확고한지 모른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또 어떤 대비를 해왔는지는 R&D 예산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게 국가다.

재해가 많아 언제나 대비한다는 일본은 또 어떤가. 2012년 일본 과학기술진흥기구가 작성했다는 ‘일본사회의 안전보장과 과학기술’ 보고서는 반성, 반성, 또 반성이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일본 사회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정책은 첨단과학기술 추진에 편중돼, 안전 등 정작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사회 안전보장을 혁신의 중요 축으로 삼고, 안전보장 관련 연구자 정보를 DB화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관련 분야 연구자가 있다’는 인식과 ‘다양한 연구자에 의한 다양한 연구’로 미지(未知)의 리스크에 대응해야 한다…위기 시 도움이 되는 과학기술을 민간에 스핀-오프(spin-off)하는 구조를 만들고, 중장기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효율성 중시 경향을 타파해야 한다.”

전 세계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를 가장 많이 한다고 자랑하는 우리나라. 한 해 16조원이 넘는 세금을 R&D 예산으로 갖다 쓰는 우리나라. 그러나 이 나라 과학기술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실종자 구조에 아무 소용도 없는 로봇 하나 덜렁 선보인 것 말고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란 것도 허상이었다. 슬픔과 트라우마만 더욱 증폭시켰을 뿐 그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한 ICT다. 터널용이다, 지하용이다 특수 DMB(이동멀티미디어방송) 재난방송 기술을 백날 개발하면 뭐하나. 선내에 갇힌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다. 하기야 국가재난통신망을 놓고도 10년 넘게 옥신각신하며 표류시키는 나라 아닌가.

정부 연구소는 폼인가

이렇게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올해 2월 미래창조과학부 용역으로 수행된 ‘국가적 재난·재해 현안에 대한 선제대응체계 구축방안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일본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재난·재해의 수요예측과 우선 투자순위 선정’ ‘재난·재해에 대한 R&D 투자효과 극대화’ 등의 구호만 앵무새처럼 떠들 뿐이다. 정부가 사회 안전보장 기술조차 무슨 기업의 일반상품 개발처럼 경제성 분석틀을 들이대니 뭘 기대하겠나.

기업이야 돈을 벌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대학은 교육과 기초연구를 한다고 치자. 도대체 정부 연구소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이 부를 때 응답하지 않는 정부 연구소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누가 과학기술을 이토록 부끄럽게 만든 것인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