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여객선 '안전불감증' 44년간 못 고쳤다
1970년 12월14일 오후 8시반께 331명으로 추정되는 승객을 싣고 제주 서귀포시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는 다음날 새벽 1시께 전남 여수 인근 바다에서 침몰했다. 원인은 초과 승선과 초과 화물 적재 등. 남영호의 정원은 290명이었다. 당시 남영호는 화물 적재정량이 넘은 400t을 싣고 있었다.

이 사고는 그로부터 44년이 지나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제주관제센터(VTS)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신고한 학생에게 “위도와 경도를 대라”고 다그쳤다. 남영호 침몰사고 때 긴급 구조신호를 듣지 못한 해경과 다를 바 없는 대응이었다. 초기 구조 인원도 마찬가지다. 가라앉는 남영호를 먼저 발견한 것은 일본 해상안전부 소속 순시선이었다. 이들이 4명을 구조했다. 뒤늦게 출동한 한국 경비정과 해군 함정은 8명을 구조하는 데 그쳤다. 총 사망자는 319명. 이후 정부의 구조활동으로 찾은 구조자는 없다. 세월호도 사고 첫날 민간어선 등과 함께 수면 위에서 건져낸 게 지금까지 구조자의 전부다.

여객선을 선장이 몰지 않았던 점도 같다. 44년 전엔 2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와 비슷)가 남영호를 몰았고 세월호는 입사 4개월차 3등 항해사가 사고 당시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다만 세월호의 초과 승선, 초과 화물 적재 여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출항 당시 제대로 점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남영호 참사 이후인 1973년 여객선운항관리제도를 도입했다. 이어 1993년 292명이 사망한 서해훼리호 참사가 발생하자 초과 승선, 화물 과적 적재를 막기 위한 선박운항관리자 제도를 도입했다. 해운자치구별 운항 관리자를 배치해 이를 점검케 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이들 참사를 교훈삼아 백서를 만들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24일 “각 부처는 혁명적 발상으로 근원적 대책을 신속하고 차질없이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남영호나 서해훼리호 참사 때 정부가 서둘러 마련했던 대책이나 백서가 이번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점이 드러나면서 ‘근본 대책’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세종=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