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쇼 코로 주한 일본대사(오른쪽)와 부인 벳쇼 마리코 여사가 비나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벳쇼 코로 주한 일본대사(오른쪽)와 부인 벳쇼 마리코 여사가 비나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흔히 외교관에겐 국적이 없다고들 한다. 오랜 시간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기 때문이다. 벳쇼 코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61)도 그랬다. 일본술 사케로 유명한 고베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를 뉴질랜드에서 보냈다. 그리고 주미 일본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1992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국 영국 프랑스 등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런 그를 40년간 지탱해준 문화적 뿌리는 일본 3대 전통극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무극 ‘노(能)’였다. 오랜 시간 노의 아마추어 배우로서 전통극 무대를, 외교관으로서 세계 외교 무대를 누벼온 벳쇼 대사를 이달 초 부인 벳쇼 마리코 여사(57)와 함께 만났다.

벳쇼 대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맛있는 만남’ 장소로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비나리’를 택했다. 벳쇼 대사는 “한우 숯불구이집이라 고기 맛도 좋지만 호박, 은행, 대추, 콩 등을 넣어 막 지어낸 돌솥밥이 일품”이라며 “일본 친구들, 특히 대학생인 딸이 한국에 오면 꼭 함께 찾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광장시장에서 찾은 한국의 매력

빨갛게 달아오른 숯이 석쇠를 달구자 살짝 간이 밴 소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기 시작했다. 벳쇼 대사는 능숙하게 고기를 잘랐고, 벳쇼 부인은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남편 입에 쏙 넣었다. 벳쇼 대사는 “일본에도 한국의 숯불구이와 비슷한 야키니쿠라는 음식이 있는데 숯 대신 가스를 사용한다”며 “일본 남성들은 집에서 야키니쿠를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너무 바빠 아내에게 많이 해주지는 못했다”고 멋쩍게 웃었다.

벳쇼 부부의 한국 음식 사랑은 유별나다. 벳쇼 대사는 업무상 거하게 차려진 한정식을 먹을 때가 많지만 틈날 때마다 칼국수, 감자탕, 추어탕, 설렁탕 등 단일 메뉴로 승부하는 맛집을 찾아 나선다. 지방 출장을 다닐 때는 현지 특산물을 꼭 먹어 보려고 하는데, 전남에선 홍어 삼합이, 전북에서는 전주비빔밥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또 파전은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으로, 일본에도 오코노미야키라는 파전과 비슷한 음식이 있어 즐겨 먹는다고 했다. 벳쇼 부인에게 혹시 한국 음식 중 잘 만드는 게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잡채를 좋아해서 일본에 있을 때 자주 해먹었다”는 자신있는 답이 돌아왔다.

마침 밑반찬과 함께 영양 솥밥이 나왔다. 솥에서 밥을 덜어내고 누룽지에 물을 부은 뒤 배추김치를 척척 얹어 먹는 부부의 모습이 꼭 한국 사람처럼 능숙했다. 영양 솥밥과 함께 나온 반찬은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정갈하고 맛이 깊었다. 평소 생활은 검소하지만 내실을 다지는 데 노력하는 일본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벳쇼 부부가 한국에서 즐겨 찾는 곳은 전통시장이다.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해 진정한 한국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벳쇼 부인이 먼저 한국인 친구들과 시장 ‘탐방’을 마치면 벳쇼 대사는 주말에 짬을 내 좋았던 곳을 따라가 보고는 한다.

“광장시장에 가보셨나요. 남대문시장, 중앙시장은 또 어떻고요. 물건을 사고파는 활기찬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은 한국에서도 가장 즐거운 곳입니다.”(벳쇼 부인)

한국 부임? 1초 망설임 없이 ‘예스’

벳쇼 대사의 한국 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임 이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아시아 침략 부인 발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교과서 문제 등으로 양국 간에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독도 영유권 교과서 명기에 항의하는 일부 보수단체가 지난 1월 그의 차에 돌진한 것.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벳쇼 대사는 “어려운 시기인 건 분명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매일 매일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벳쇼 대사는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한국 부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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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 대사 자리는 유엔 대사, 미국 영국 등 주요 8개국(G8) 대사, 중국 대사와 함께 가장 중요한 포스트”라고 강조했다. 한국 부임 전 외무성에서 일본 외교를 총괄하는 외무성 외교정책국장과 외무심의관을 지낼 당시 일본에 있어 한국은 중요한 나라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벳쇼 대사는 “한국과 일본은 중요한 동반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속에서도 결코 전체적인 관계를 훼손해선 안 되며, 앞으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벳쇼 대사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젊은이들 간의 만남이다. 그래서 직접 한국의 대학들을 찾아가 강연하고, 한·일 자매도시 간 워킹홀리데이 등의 교류를 적극 지원한다. 벳쇼 대사는 “한국과 일본의 자매도시가 151곳이고, 서울에 사무실이 있는 현(일본의 행정단위)이 4곳이나 된다”며 “정부가 나서서 하기 힘든 화합이 민간 차원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울산과 일본 하기시(市)는 1968년부터 자매도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40년간 전통극 ‘노’ 배우로 활약

벳쇼 대사 부부는 ‘문화 외교 커플’로 통한다. 벳쇼 대사는 40년간 전통극 노의 배우로 종종 무대에 섰다. 부인은 손재주가 뛰어나 자수와 꽃꽂이 실력이 수준급이다. 벳쇼 대사는 “18세 때 수학 선생님의 권유로 ‘노’를 처음 접한 뒤 매력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노의 출연자는 모두 남성으로 노멘(能面) 또는 오모테(面)라고 부르는 가면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연기자가 노래를 부르며 반주에 맞춰 무용을 하는 일종의 악극인데 그 역사가 600년에 달한다.

벳쇼 대사는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는 가부키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상업화한 반면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노는 일본인들조차 10% 정도만 즐긴다”고 말했다. 10%만 빠져든다는 노의 매력이 궁금했다. 그는 “기모노를 입고 무대에 올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과 슬픔 등 희로애락을 순수한 형태로 담담하게, 밀도 높게 전달하는 것이 노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을 떠나 살면서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일까. 1년에 한두 번은 기모노를 입고 노 전용 무대에 올랐다.

후식으로 나온 배를 먹으면서 이야기는 두 나라의 문화와 음악 이야기로 흘렀다. 벳쇼 대사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김덕수 선생님 부인이 재일동포이신데 그분이 발견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박자’였다”며 화제를 던졌다. 그러면서 손으로 테이블을 ‘탁, 탁탁, 탁탁탁’ 두드려 가며 “김덕수 선생께서 같이 걷던 부인이 힘들어 하자 ‘일본은 2박자, 4박자인데 한국은 ‘쿵덕덕’ 하는 3박자가 있어 이 리듬을 타면 길을 오래 걸어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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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 부인이 이때 가방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찾아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조금 서툴지만 정성껏 써내려간 한글 서예 액자가 있었다. ‘세상에서 무엇이 안 변하나. 아스카 강물 어제의 깊은 소가 오늘은 여울 되었네’라는 글귀는 벳쇼 대사가 직접 일본의 ‘와카’라는 시를 번역해 쓴 것이다. 그는 “한국에 부임하고 나서 (지금은 별세한) 남덕우 전 국무총리를 만나 직접 쓰신 서예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후 어릴 때 잡았던 붓을 다시 잡았고, 한글과 한자, 히라가나의 차이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비빔문화 제맛 알게 됐다”

벳쇼 대사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는 비슷한 게 많다며 대표적으로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꼽았다. 벳쇼 대사는 “이달부터 5%에서 8%로 인상한 일본의 소비세도 고령화, 저출산으로 일본 사회의 복지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단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은 저출산 문제를 함께 안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에서 인력을 받아들이는 정책에선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벳쇼 대사 부부에게 한국에 오기 전엔 낯설게 생각했지만 한국에 온 후 익숙해진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벳쇼 부인은 손을 휘휘 저으며 “비빔밥 문화”라고 했다.

“일본에서 알던 한국인 지인이 한국 사람들은 카레밥, 팥빙수, 샐러드 등을 먹을 때 처음부터 한꺼번에 다 섞어서 먹는다고 들었어요. 그땐 이해가 안 됐죠. 하지면 이제는 뭐든 비비면 비빌수록, 섞으면 섞을수록 제맛이 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한국이 가진 독특한 저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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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쇼 대사의 단골집 ‘비나리’ 구리석쇠에 구운 갈비 ‘군침’…화학조미료 전혀 안 써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일본은 2박자, 4박자…한국은 '쿵덕덕' 3박자…그 리듬에 남다른 힘 있어"
양질의 한우만 고집하는 숯불구이 전문점이다. 경복궁 옆 서울 사간동에 2003년 문을 열었다. 비나리는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가족, 직원들과 함께 즐겨 찾은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고가구와 그림들로 실내가 꾸며져 가게에 들어서면 화랑에 온 듯한 분위기가 난다.

비나리는 화학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 주인이 직접 담근 된장 등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낸다. 대표 메뉴인 생갈비는 열전도가 좋은 구리 석쇠에 구워내 고기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고구마, 단호박, 대추, 은행, 콩 등이 들어 있는 영양 솥밥과 된장찌개가 포함된 너비아니 정식은 정갈한 밑반찬과 함께 담백한 맛을 자랑하는 인기 메뉴다. 테이블마다 ㄱ자 모양의 연기 흡입기가 달려 있어 고기 구울 때 연기가 많이 나지 않는 것도 장점.

생갈비 6만원, 살치살 5만5000원, 꽃등심 4만9000원, 양념갈비 4만4000원, 생등심 4만원, 너비아니 정식 2만8000원 등이다. (02)734-9761

김보라/김순신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알림=주한 일본대사의 이름을 외래어표기법상 ‘벳쇼 고로’로 써 왔으나 대사관의 요청에 따라 ‘벳쇼 코로’로 표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