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스포츠토토 사이트를 개설하고 인터넷 방송으로 경기를 실시간 볼 수 있도록 불법 방송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 일당의 국내 사무실 모습. 서울 은평경찰서는 지난달 24일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혐의로 조모씨(38)를 구속했다. 연합뉴스
불법 스포츠토토 사이트를 개설하고 인터넷 방송으로 경기를 실시간 볼 수 있도록 불법 방송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 일당의 국내 사무실 모습. 서울 은평경찰서는 지난달 24일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혐의로 조모씨(38)를 구속했다. 연합뉴스
‘미안해요. 저를 찾지 마세요.’

경기 수원시에 거주하는 A씨(29)는 지난달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졌다. 편지엔 ‘빚이 너무 많다. 그동안 사고를 많이 쳐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A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3년 전 불법 스포츠토토에 손을 대면서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평소 프로야구 경기 시청을 좋아하던 그는 친구로부터 “돈을 걸면 경기 시청이 더 재밌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팅을 시작했다.

스포츠토토에 빠져 있던 그를 헤어날 수 없는 도박의 늪으로 몰아넣은 것은 지난해 5월 등장한 ‘홀짝 게임’이다. 승(O)과 패(X)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5분 뒤에 ‘사다리 게임’에 대한 베팅 결과가 나온다. 사다리 게임은 스포츠 경기보다 베팅 결과를 훨씬 빨리 알 수 있는 신종 도박.

그는 이 게임에 빠져들면서 베팅 규모를 점점 늘려갔다. 급기야 저축은행과 대부업체에서 지난해 6000만원을 빌렸고, 올 들어서도 400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그렇게 1억원에 가까운 돈을 탕진했다.

최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A씨는 “5분에 100만원까지 베팅이 가능한 홀짝게임의 중독성이 생각보다 강했다”며 “내가 진 빚은 가족들이 여러 번 갚아 줬는데, 미안한 마음에 세상을 등지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불법 스포츠토토 게임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기존 게임보다 베팅 속도가 빠른 신종 게임이 등장했고, 외국인이 한국의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모아 해외 사이트에 투자하는 일명 ‘베팅 펀드’도 횡행하고 있다.

사행성이 강해진 불법 토토 게임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거나 범죄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5분에 100만원까지 베팅…‘홀짝’ 게임 등장

네임드 관계자는 "무료 콘텐츠를 불법 업체에서 이용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하다"며 "사다리 게임을 이용하는 불법업체에 대해서 강력히 법적 대응 중"이라고 밝혔다.
네임드 관계자는 "무료 콘텐츠를 불법 업체에서 이용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하다"며 "사다리 게임을 이용하는 불법업체에 대해서 강력히 법적 대응 중"이라고 밝혔다.
A씨가 빠졌던 ‘홀짝’ 게임은 기존 스포츠토토 게임보다 베팅 시간이 짧고 많은 금액을 투자할 수 있어 중독성이 크다.

기존 스포츠토토는 야구 축구 등 스포츠 게임을 기초로 한다. 스포츠토토 사이트에서 게임 진행 전 승패 가운데 하나를 고른 뒤 게임의 결과를 맞히면 배당률만큼 수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야구나 축구 등 스포츠 경기는 게임의 진행시간이 길기 때문에 잦은 베팅이 쉽지 않다.

이런 시간적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불법 스포츠토토 사이트에 등장한 홀짝 게임은 스포츠 경기가 아닌 사다리 게임을 기반으로 도박이 진행된다.

사다리 게임은 토토 정보를 공유하는 ‘네임드’라는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네임드에선 쉬어가기 코너로 ‘사다리 게임’이 이뤄지는데, 선택지는 O, X 두 가지다. 5분에 한 번 자동으로 사다리 타고 내려가 승부가 결정된다.

불법 스포츠 토토 사이트에서는 게임 1회당 최고 베팅액은 100만원이다. 게임의 배당률은 보통 1.8~1.9배 수준이다. 100만원을 베팅해 결과를 맞히면 180만~190만원의 돈을 돌려받는다. 한 시간에 12회까지 최대 1200만원을 베팅할 수 있다. 게임에서 모두 승리하면 배당률 1.9배를 적용해 한 시간에 1080만원까지 돈을 따는 게 가능하다. 물론 12회 모두 패한다면 1200만원을 잃게 된다.

합법? 외국인 주도 베팅펀드 등장

게임뿐만 아니라 베팅 방식에서도 불법 스포츠토토는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베팅 펀드’다. 해외 사이트에 베팅하기 위해 외국 국적의 중개상이 국내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모아 베팅을 대행하는 방식이다.

이 펀드는 합법적인 국내 토토 사이트의 베팅 한도를 높이기 위해 조성됐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스포츠토토가 운영하는 ‘배트맨’만 합법적인 사이트다. 하지만 배트맨은 1회차 베팅 금액을 최대 10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영국 등 해외 합법 사이트는 베팅 한도가 이보다 큰 곳이 많다. 중개상들은 국내 투자자로부터 외국 국적의 계정으로 돈을 송금받아 해외 합법 사이트에 베팅을 대행해준다. 일명 ‘스보벳’이라 불리는 사이트는 보다 많은 돈을 베팅하려는 사람들과 해외 합법 사이트를 연결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베팅펀드에 돈을 송금하는 것도 ‘불법’이다. 경찰 관계자는 “한국인이 배트맨 외의 사이트에 베팅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며 “베팅을 목적으로 외국인에게 돈을 송금했다면 처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베팅에 빠진 사람들…범죄자로 전락

[경찰팀 리포트] 야구 보며 시작한 토토…'홀짝 게임' 베팅에 빠져 1억원 홀딱 날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불법 스포츠토토가 진화하면서 피해자도 늘고 있다. 이들은 돈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실제로 서울 광진경찰서는 최근 불법 스포츠토토로 4000만원을 탕진하고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을 턴 B씨(28)를 붙잡았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이하 사감위)가 파악한 불법 스포츠토토 시장의 규모는 지난해 7조6000여억원에 이른다. 국내 전체 불법 도박 규모가 75조원대임을 감안하면 10%에 육박하는 셈이다. 고려대 산학협력단이 사감위의 요청을 받아 제출한 연구 결과에는 국내 불법 스포츠토토 운영 조직이 250~365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 스포츠토토가 횡행하고 있지만 적발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경찰 관계자는 “불법 스포츠토토의 대부분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사실상 단속이 어렵다”며 “모든 사이트를 차단하면 역으로 수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사이트를 발견하면 우선 방송통신위원회에 접속 차단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불법 도박 사이트의 진화를 적기에 파악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급선무”라며 “단속 및 처벌 노력과 함께 사이트 필터링과 접속차단 행위를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국 가톨릭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홀짝’ 사다리 게임은 쉽고 결과가 신속하게 나오기 때문에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며 “불법 도박 피해자는 처벌 대상인 동시에 치료 대상인 만큼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조직을 개편해서라도 적극적인 관리와 예방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호/오형주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