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근로시간 단축, 더 신중해야 하는 이유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로 꼽힌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간혹 거슬리기도 한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으레 밤늦게까지 일만 하는 사람으로 비쳐질 때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한국 근로자들의 장시간 근로관행은 익히 알려져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연간 근로시간 평균이 1776시간인 데 비해, 한국은 무려 2092시간이다. 물론 그 덕분에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은 빠르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시간 근로관행이 노·사·정 모두에 부담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장시간 근로는 근로자로 하여금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자신의 건강을 돌볼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사용자에도 장시간 근로관행은 애물단지다. 생산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기업 가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장시간 근로를 하는 기업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그저 싸고 저렴해서 ‘좋은’ 물건일 수는 있지만, 인간적 감성을 담은 ‘명품’ 일 수는 없다. ‘일류기업’과 ‘장시간 근로’는 그래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정부 입장에서도 ‘최장시간 근로국가’로서 한국의 이미지는 고민거리다. 오늘날 선진국은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총생산(GNP)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민이 누리는 여유와 행복이 ‘진짜 선진국’의 요건이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근로자와 그 가족인 점을 감안하면, ‘장시간 근로’와 ‘선진국’이라는 개념 또한 양립할 수 없다.

노·사·정 모두 근로시간 단축에 과감하게 나서야 하는 이유는 이렇듯 충분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섬세하면서도 전략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구직자로 넘쳐나는 대기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력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도 있다. 만약 중소기업 사업주가 “당장 신규인력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근로시간마저 줄이라고 하는 것은 공장가동을 포기하라는 것”이라고 하소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저 어설픈 변명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만약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근로시간 감소가 임금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신규인력의 양성’과 ‘노동생산성의 제고’, 무엇보다 ‘근로자들의 임금저하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근로시간 단축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기업의 규모나 업무내용을 살펴, 노사 모두에 치밀하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과거 일본도 실근로시간이 2000시간을 웃돌자 법정근로시간을 주48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했다. 1987년의 일이다. 하지만 전 사업장에 적용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7년이다. 사업장의 사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근로시간 단축을 실행한 결과다. 지금 우리는 68시간인 최장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줄이려고 한다. 무려 ‘16시간’이다.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는 굳이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과거에 이뤄져 온 장시간 근로관행에 대해, 형벌 부과 운운하는 것은 경솔해 보인다. 그것은 가족과 기업, 그리고 나라를 위해 부지런히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고 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래야만 했던 노사 모두에 조금은 염치없는 일이다. 노동현장에서 근로시간 단축에 관한 입법논의를 ‘규제의 강화’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좀 여유를 가지시라’는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지혜가 절실해 보인다.

권혁 <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khyuk29@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