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기업은행의 김영찬 서부지역본부장은 올초 권선주 행장에게 문자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거래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당시 한창 이슈로 부상한 ‘통상임금’에 관해 걱정과 문의를 많이 한다는 분위기를 전했다.

CEO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은 사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힘든 일이다. 상명하복과 파벌주의 문화가 여전한 은행가에서는 자칫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특히 기업은행은 한 번의 인수합병(M&A)도 없이 성장한 탓에 순혈주의가 강해 위계가 더 엄격하다. 이럼에도 김 본부장이 문자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권 행장이 지난해 12월30일 취임 직후부터 ‘필요하면 언제든 문자로라도 보고하라’고 당부해왔기 때문이다.

문자를 받은 지 한 달여 만인 지난 2월 권 행장은 서부지역본부 거래 중소기업 CEO 30여명을 서울의 한 호텔로 초청했다. ‘통상임금 및 60세 정년 법제화에 따른 대응 방안’을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한 것이다. 만나서 인사하고, 얘기 몇 마디 나누다 헤어지는 겉치레식 행사와는 다른 맞춤 강연에 참석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

이후 권 행장은 현장을 돌 때마다 사전조사를 거쳐 세미나를 연다. 지난달에도 경서지역본부 거래 기업 CEO 50명을 초청, 지식재산 활용 방안을 강연했다. 경영 세무 회계 등 여러 분야에서 기업에 제공한 컨설팅 사례도 이 자리에서 공유했다.

현장 귀 기울이는 세심함과 포용력

권 행장은 지난해 말 국내 최초의 여성 은행장 탄생 스토리를 전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각계에서 축하와 기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은행의 경영을 여성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편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4개월째로 접어든 지금 권 행장은 자신만의 색깔과 리더십으로 우려를 씻어내고 순항 중이다.

권 행장은 어쩔 수 없이 유약해 보이기 쉬운 여성성을 어머니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친근함과 포근함으로 발전시켰다. 또 부드럽다가도 필요할 때는 강한 뚝심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한국의 어머니 같은 ‘마더(mother) 리더십’을 구축 중이라는 평가다.

그의 소통과 포용력은 지난 2월 강원 지역 폭설사태 때 잘 발휘됐다. 당시 강릉지점은 주말 내내 내린 폭설에 파묻혀 고객이 방문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해당 지역본부장은 급한 마음에 카카오톡으로 권 행장에게 ‘폭설이 내렸다’고 우선 보고했다.

영업점 직원이 전부 삽을 들고 제설 작업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직원 한 명이 진땀 나는 제설작업 현장 사진을 다시 권 행장에게 전송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구세주처럼 제설 현장에 나타났다. 권 행장이 본점 총무부장 등에게 신속한 지원을 지시한 결과였다.

뚝심과 강단으로 은행가에 긴장 몰고 와

부드럽지만 무서울 땐 아버지보다 엄한 게 어머니다. 지난해 정부로부터 사들인 자사주 2620만주로 15일 3억달러(약 3092억원) 규모의 해외 주식예탁증서(GDR)를 발행한 것에서 권 행장의 뚝심과 내공이 잘 드러난다. 이날 GDR 발행가격은 시세보다 4.4% 낮은 1만1800원(11.39달러)으로 결정됐다. 최근 1년간 아시아지역의 GDR 발행 때 평균 할인율 7.5%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정부는 애초 기업은행의 자사주 매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보유 중인 기업은행 주식을 더 처분해 부족한 재정을 마련해야 하는 입장이어서다. 기업은행이 자사주를 처분하면 관련 규정상 정부 지분은 90일 동안 팔 수 없다.

기업은행장은 대주주인 정부의 심기를 살필 수밖에 없는 자리인데도 권 행장의 설득은 집요했다. 지난해 정부가 힘들 때 자사주를 사 준 만큼 이번에는 은행의 입장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사주 매각으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올라가면 나머지 정부 지분 매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득 논리도 곁들였다.

결국 GDR 발행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부드러운 줄만 알았더니 강단이 대단하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단번에 경쟁 은행들을 긴장 모드로 몰아넣은 것이다.

부드러움을 더 돋보이게 하는 평정심

권 행장의 강단은 사실 오래전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1992년 서울 광장동 워커힐지점에서의 에피소드가 그의 카리스마를 잘 보여준다.

당시 지점에서 일하던 권 차장 앞에 30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가 들이닥쳤다. ‘할 말이 있다’면서 영업시간이 끝난 뒤 지점 뒷문을 두드린 것이다. 대뜸 권 차장에게 다가온 그는 “당신 때문에 부도 위기에 몰렸다”며 바지 속에서 칼을 꺼냈다. 지점 동료들은 너무 놀라 너나없이 얼어붙고 말았다.

아수라장 속에서 권 차장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나지막이 “여기서 칼을 휘두르면 내 인생이 아니라 당신 인생이 망가지는 겁니다”고 말했다. 위기 모면용으로 던진 이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자가 사과했고, 일은 원만하게 해결됐다. 권 행장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그의 강단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일화다.

‘고객 생애와 함께하는 은행’ 시동

저금리 구조가 굳어져 이제 금리만으로는 고객을 끌어올 수 없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이 같은 고민에 권 행장은 ‘힘내라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전사적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캠페인에도 마더 리더십이 잘 살아 있다. 거창한 조건을 제시하기보다 고객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학생들에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병영체험 기회를 주고, 마술로 즐기는 금융교육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식이다. 대학생에게는 기업 탐방을 주선하고, 주부들을 위해서는 자녀와 함께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는 행사도 준비했다. 중장년층에게는 휴가철에 기업은행의 연수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권 행장은 올 1월2일 을지로 본점에서 시무식을 한 뒤 곧바로 36년 전 처음 발령받았던 동대문지점을 방문했다. 고객의 생애와 함께하는 든든한 은행이 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고객 한 명, 한 명을 평생 고객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천 중인 권 행장의 행보에 은행가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 권선주 행장 프로필

△1956년 전주 출생 △1974년 경기여고 졸업 △1978년 연세대 영문학과 졸업, 기업은행 입행 △1998년 방이역지점장 △2005년 CS센터장 △2009년 외환사업부장 △2010년 중부지역본부장 △2011년 카드사업본부장 △2012년 리스크관리본부장 △2013년 12월 기업은행장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