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몰래 사라진 李대리, 그 틈에 소개팅…인연찾기 1시간이면 충분!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에 다니는 김모 대리는 이달 들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소개팅을 하고 있다. 회사 주위에 벚꽃 진달래 등 봄꽃이 만개하면서 솔로인 김 대리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 어차피 상대 여성도 여의도 증권사 직원인 경우가 많아 굳이 주말에 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소개팅이 있는 날이면 오전 11시30분께 사무실을 나간다. 점심식사를 끝낸 뒤 근처 여의도공원 산책까지 해도 오후 1시 전에 회사로 들어올 수 있다. 김 대리는 “점심 소개팅은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장소를 계속 바꿔야 하는 것은 조금 귀찮다. 자칫 소개팅 도중에 이전 소개팅녀와 마주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오아시스와 같다.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쉬거나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점심시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김과장 이대리들의 점심시간 활용법을 살펴본다.

게임과 운동하는 ‘취미파’


대형 회계법인의 입사 4년차 회계사인 김모씨는 오전 11시30분이 되면 미리 사 놓은 샌드위치로 사무실에서 점심을 때운다. 벌써 2주째다. 점심을 빨리 먹는 이유는 ‘점심블로’를 즐기기 위해서다. 점심시간에 최근 확장팩을 발매한 컴퓨터 게임 ‘디아블로3’를 하고 있다. “낮 12시가 되면 회사 근처 PC방으로 뛰어가야 해요.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으니까요.”

김 씨는 디아블로 확장팩 발매일인 지난달 25일 월차를 내고 집에서 하루종일 게임을 했다. 마침 기업 감사 시즌이 끝난 터라 크게 눈치는 안 보였다. 얼마 전 동료도 생겼다. PC방에서 우연히 게임 중이던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헉. 회계사님도 디아블로 하세요?”라고 묻더니 살포시 ‘친추(친구추가)’를 했다. “단 한 시간만 게임하는 게 감질나지만 감사 시즌에 고생한 저한테 스스로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요. 동료들은 운동하는 줄 아는데 뱃살이 그대로니 금방 탄로가 나겠죠.”

강남에 있는 중견 건설사에서 근무하는 최모 사원은 요즘 점심시간마다 사내 피트니스센터에서 필사적으로 운동한다. 입사 후 잦은 회식으로 늘어난 뱃살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1년 전 사내 헬스장의 ‘점심반’을 신청했다. 하지만 대기자가 넘쳐 예약을 걸어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무려 1년을 기다려서야 신청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던 그는 점심시간마다 성실하게 운동하고 있다. “점심때 운동하려는 직원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1년을 기다린 기회라서 그런지 운동시간을 거의 안 빠뜨리는 것 같아요.”

1주일에 한 번은 ‘외국인과 밥 먹는 날’

대기업 정보기술(IT) 계열사인 A사 국내 마케팅팀은 얼마 전 새로운 팀원을 받았다. 해외법인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직원이 장기파견을 나온 것. 말그대로 ‘국내’ 마케팅팀이어서 영어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팀원의 고충은 컸다. 결국 이 외국인 직원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특히 점심시간이 문제였다. 외국인 직원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팀장은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팀장 본인도 영어실력이 부족해 이 외국인 직원과 매일 식사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식사당번제였다. 국내 마케팅팀 직원들이 하루씩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그 직원과 함께 점심을 먹게 했다. 팀원들은 피할 수 없는 당번제가 부담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은 회사 직원이고 잘 챙겨줘야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외국인 직원과 둘이서 점심을 먹으면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어요.”

영업직은 점심시간에도 비상

대기업 영업팀에서 일하는 김모 과장은 30대 중반인 이른 나이에 당뇨 초기 판정을 받았다. 점심과 저녁 가릴 것 없이 많은 접대와 회식을 해야 하는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경고’였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간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운동을 결심한 김 과장.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받을 수 있는 샐러드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회사 근처에서 직장인 요가 강좌를 듣기로 했다. 회사 헬스클럽에서 운동하자니 눈치가 보여 동료들이 많이 없을 것 같은 요가를 선택한 것.

그러나 전화가 문제였다. 영업직 특성상 항상 전화벨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에게 요가 강사가 전화기를 두고 수업을 받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고객 전화를 놓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불안했던 김 과장은 진동모드로 바꾼 휴대폰을 몰래 작은 가방에 넣어 강의실에 반입했다. 그러던 어느날 강의실 적막을 깨고 터진 벨소리. 진동 모드 전환을 깜빡한 게 탈이었다. 강의실에서 쫓겨난 김 과장은 “24시간 대기해야 하는 영업직은 점심시간도 마음대로 활용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점심 왕따의 비애

종로3가 근처 금융사에서 근무하는 한모 대리는 사내에서 가장 같이 점심을 먹고 싶은 파트너로 꼽힌다. 싹싹하고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러브콜이 이어진다. 동료들이 같이 먹을 사람을 못 구하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한 대리다.

한 대리를 중심으로 점심 약속이 없는 사람끼리 모여 맛집을 찾아가는 경우도 잦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한 대리 메신저에 불이 났다. 의견을 모아 오랜만에 맛있는 햄버거를 먹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회사 근처에는 정크푸드를 파는 가게가 없어 15분가량을 걸어가야 했다. 도착하니 대기자 줄이 벌써 길게 늘어져 있었다. 주문하고 뒤를 돌아보던 한 대리는 깜짝 놀랐다.

옆 부서에 근무하는 노처녀 오 과장이 구석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있었던 것. 오 과장은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성격 탓에 동료들이 같이 식사하기 싫어 하는 사람 1순위다. 회사 근처는 사람들 눈이 많아 일부러 멀찌감치 한 블록이나 걸어와 혼자 점심을 먹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둘 다 어쩔 줄 몰라했다. “회사 사람들 눈을 피해 여기까지 온 오 과장님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마주친 우리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강경민/김은정/황정수/김동현/김대훈 기자 kkm1026@hankyung.com